본문 바로가기

무슨 생각하니60

천신암 뜻밖에도 그 집은 예전에 점집이었다. 지도 앱 거리뷰에서는 일찍이 2011년의 이 동네 사진을 찍어놓았는지 손쉽게 당시 모습을 조회할 수 있었다. 화면을 최대로 확대해서 시커먼 대문 옆을 들여다보니 나무 간판이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굵은 브러쉬로 거칠게 적은 ‘천신암'이라는 검정 글씨가 있었고, 불교에서 쓰는 ‘만(卍)'자가 바로 위에 붉게 칠해져있었다. 앱에서 조회 가능한 날짜 목록을 살펴보니 연도별로 2011년부터 지금까지 띄엄띄엄 열 개 버전의 거리뷰를 조회할 수 있었다. 2013년만 해도 여전히 ‘천신암'이었고 2014년엔 간판이 사라져 있다. 2016년, 대문을 새로 페인트칠한 것 같더니 17년 사진엔 집 한가운데가 폭삭 무너져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집은 출입을 금한다는 테이프가 담장.. 2024. 11. 8.
손끝만 바라봤네 삼십 년 넘게 산 보람은 있다. 손가락으로 툭 끊어도 아프지 않을 거스러미를 골라내는 경험치가 쌓였다. 예전엔 관성을 이용해 한 손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원하는 칸만큼 끊는 것처럼 호기롭게 팍 당겼다가 손가락의 첫째 관절까지 거스러미가 잘못 뜯어지기도 했었다. 손가락과 그 손가락의 주인에게 미안했다. 소독은 애당초 모르고 살았으니 부위가 벌겋게 부은 적도 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지, 이것도 어린 날의 치기 또는 젊음의 패기라고 포장할 수 있을까. 뉘우침도 잠시, 머지않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얼얼한 부위를 멋쩍게 꾹꾹 눌러보고, 다시 미간을 찡그리며 앞니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애꿎은 손 끝에 입김만 호호 불었다.  이제는 녀석의 이름처럼 신경을 더 거스르기 전에 거스러미 발생에 슬기롭게 대처할 .. 2024. 10. 24.
술잔을 부딪히며 탓탓탓 주제 : 내 탓 네 탓 “내가 맞았고, 너가 잘못했어. 그런데 괜찮아.” (토닥토닥) 이라는 제목으로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숏폼 영상. 오해 또는 성격 차이로부터 갈등을 겪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눈을 바라본 채로 위 대사를 동시에 또박또박 읊는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내가 맞았고” 를 말하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친다.“너가 잘못했어” 를 말하며 바로 앞에 서 있는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한다.“그런데 괜찮아” 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서로를 껴안으며 등을 토닥여준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동시에 말하기. 그래야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두 사람의 집요한 주장이 모두 참이 되니까. 두 번째는 스킨십. 가벼운 포옹으로 말과 목소리가 줄 수 없는 감정을 나눌 수 있.. 2024. 10. 17.
플레이스 비욘드 더 논두렁스 그날은 2015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긴팔에 반바지 차림의 활동복을 입을 수 있는 그런 날. 한가로운 주말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 입대 동기인 제제에게 저녁 식사 전에 산보를 제안했다. 제제는 익숙한 듯 수락하며 관물대에서 숟가락을 챙겼다. 식단표를 확인하곤 생활관 밖으로 나섰다. 우리는 전역을 보름 앞둔 말년 병장으로 당직 근무에서도 막 제외되었던 터라 부담 없이 부대에서의 남은 날들을 즐기고 있었다. 사지방, PX가 더이상 특별해지지 않은 무렵부터는 사단 내에 발을 들여보지 않았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년을 보냈다. 우리 사단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철책 테두리 안에는 열 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부대가 넓게 퍼져 있었다. 각 부대는 건물을 하나씩 사용했다. 한 치의 변형도 허용하.. 2024. 10. 1.
다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응급상황'을 주제로 쓴 글. 난 왜 공익 광고 같은 글만 쓰게 되는가..   생각해 보니 CPR을 아주 오래전부터 배워왔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드문드문 접할 때까지만 해도 효과를 의심했었다. 인공호흡 몇 번, 가슴 압박 몇 번 한다고 정말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그러다가 고등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 CPR 교육을 듣게 되면서 골든 타임 내에 이를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학교나 관공서에 막 보급되던 심폐소생술 학습 인형 ‘애니(Anne)’를 활용해서 모의로 실습까지 해볼 수 있었다. 두꺼운 가슴뼈 아래에 있는 심장을 마사지하기 위해선 손꿈치에 체중으로 강한 힘을 실어 깊이 가슴을 눌러주어야 했다. 왜 심폐소생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질 수 있다고 하는지 그제야 어렴풋이 실감했다. 특.. 2024. 9. 20.
최후 전선 1mm를 사수하라 늑대의 유혹, 동방신기와 버즈 민경훈의 샤기컷. 그로부터 촉발된 각종 헤어컷들의 향연. 개성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 교집합엔 기다란 구레나룻(정식 명칭은 ‘옆머리’가 맞다.)이 있었다. 그만큼 2000년대 중・고 남학생들에게 두발 규정으로부터 구레나룻 기장을 사수하는 일이란 알량하지만 중차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건대 인근에 위치한 미용실이 잘 나가는 형들과 멋쟁이들의 산실로 유명했었다. 커트 비용은 당시 시세의 3~5배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머리 스타일을 극진한 서비스와 함께 선보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 코흘리개 학생들은 꼬깃꼬깃 가져온 사진과는 사뭇 다른 뚜껑으로 동네 상가 미장원 문을 열고 나오며 가슴으로 눈물을 삼켰다는 후문.   우리들의 구레.. 2024.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