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정도로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짧게 한토막으로만 쓰여있는 현대 정권 파트는 항상 시시하게 훑고 넘겼다. 선생님들도 난이도가 낮음을 알았기 때문에 중간, 기말고사에 2000년대 정부는 문제로 내지 않았다. 사제간 합의된 이런 안일함이 무색하게 하루하루 무거운 역사를 감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전 세계와 온 국민이 주시하는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이다. 좀처럼 말이 없는 나의 말문을 더 막히게 한 사건이다. 이 소란의 말도 안 되는 정도를 헤아리자니 한이 없고, 주동자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에 대해서 가늠해 보자니 아득해질 뿐이다. 계엄이 곧 무소불위의 권능이라 착각한 사람의 이번 내란 사건은 얼마나 많은 삶의 자전축을 틀어놓았을까? 아마존에 서식하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킨다던데, 처음 충격이 이만큼 넓고 거대하다면 후에 닥쳐올 혼란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 상상조차 어렵다.

 

  12월 3일 밤, 계엄 소식은 온갖 경로를 통해 급속도로 타전되었다. 처음 속보를 보았을 때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종류의 계엄이 갑자기 생긴 건지 머리 속을 차근차근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담화 방송에서 그 사람은 정말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여소야대를 스스로 초래했으면서 야당 때문에 올바르게 국정이 운영되지 않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계엄을 한다고? 20%도 안 되는 지지율로 국민들의 믿음을 구걸한다고? 그래, 그럼 당신이 고안한 비상계엄은 어떤 식입니까? 일단 지켜보자 하며 업데이트되는 뉴스들을 지켜보았다. 

 

  옆에서 책을 읽다 졸던 애인이 잠깐 깼을 때, 너무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여 최대한 건조하게 소식을 전했다. 계엄…이 터졌다는데? 분명 건조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애인은 올해, 아니 우리가 만난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놀랐다. 패닉 속에 잠시 관련 소식을 확인하더니 국회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다칠 것이 두렵다고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두터운 옷들을 허겁지겁 꺼내입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말을 여러 차례 건네며 말렸다. 하지만 애인의 눈에는 바위같이 단단한 무언가가 서려있으면서도 눈가에는 또 무엇인가를 향한 물기가 매달려있었다. 이미 그는 발걸음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한 단계 상위 국면으로 활성화된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포고령 1호가 발동되었다. 불과 몇 주 뒤면 2000년대의 첫번째 사반세기를 맞이할 텐데 수십 년 전 군사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통제? 처단? 라이브 뉴스 화면에는 실제로 국회 앞으로 특전사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군인들이 와서 정말 위험하니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말했지만, 끝내 현관에서 장갑을 찾는 애인에게 나는 개중 가장 따뜻한 장갑을 건넬 뿐이었다.

 

  애인은 어떤 사람들이 다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를 곧장 국회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에 반해 나는 무엇을 망설였을까? 내가 마음 속으로 읊었던 수 십 가지의 ‘설마…’는 얼마나 보잘것없었을까? 갈라진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빚을까? 내가 일단 집에 있어야 한다고 떠올린 이유들은 그저 핑계 아닌가? 난 결국 방에서 편하게 상황을 지켜본 사람으로 분류되는 걸까? 많은 물음들과 부채감 속에 나는 유튜브로 뉴스를 켜놓을 뿐이었다. 당시 급했던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아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애인이 국회 앞에서 올리는 실시간 게시물에 차마 좋아요를 누를 수가 없었다. 그 속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유니폼을 입고 뒤엉켜있었다. 오히려 애인을 지켜주어야 하는 입장이면서, 되려 체면 없이 속없이 응원한다며 좋아요 누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피 말리는 시간 속에 의결 정족수가 채워지고, 비상 계엄 해제안이 가결되었다. 가결을 선포하는 국회의장의 의사봉 3연타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들렸다. 그 시점 이후로 모든 상황이 마법처럼 전환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소식을 듣지 못해 하려던 일을 계속 하려 했고 다른 누군가는 주춤했을 것이다. 자칫 더 큰 혼란으로 빠질 수 있었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은 기울어진 전세에 환호했고 우왕좌왕하던 군인들은 철수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의 차를 얻어 탄 애인도 무사히 귀가했다. 사람들이 보낸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다녀왔다는 말에 나는 그제야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7일 저녁, 나는 교통마비 탓에 국회로 가기 위한 우회로로 서강대교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남북단을 오고 갔다. 한강도 칠흑같이 검었지만 이내 곧 작고 밝은 빛이 즐비한 곳에 도착했다. 이 사람들이었구나. 그 속에서 나는 앞서 죽은 자들의 두터운 비호를 실감나게 느꼈다. 잘 썼으니 지켜주고 싶고, 좋은 줄 아니 계속 물려주고 싶은 사랑과 평화를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