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레터링 디자인 워크숍 수강 회고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떠오르는 모양대로 글자들을 그려보고, 스캔 후 디지털 환경에서 벡터화하는 과정을 몇 차례 해보았다. 작업한 글자들이 내가 만든 포스터나 홍보물 등에 활용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요상하면서도 뿌듯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코칭 없이 혼자서 하다보니 결과가 나와도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중간에 빠트린 과정이 있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매 작업마다 항상 뒤따랐다. 의문에 휩싸여 결과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나오기도 했고. 이런 의문을 해소하고 실제 현업에 계신 분들의 프로세스를 엿보고 싶어서 레터링 워크숍을 등록했다.
 
  진작에 레터링 수업을 왜 안들었냐? 한다면... 왜 안 찾아봤겠나. 많은 레터링 디자인 워크숍이 개설되어 있다. 하지만 너무 완성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거나 비용이 예산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수업도 많아 입문자인 나에게 적합한 워크숍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몇 달 정도 살펴보다가 마침내 만난 '코스모프 타입'의 한글 레터링 디자인 워크숍 5주 과정. 자세한 주차별 과정이 미리 공유가 되어 있었던 점이 좋았다. 안 그런 워크숍이 있겠냐만은 은근... 없다. 집에서 거리가 멀었지만 후기도 좋고 난이도도 맞는 것 같아서 너무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제했다.
 

✔️ 1주차 무드보드 작성

  첫날이 다가오면서 '아 분명히 아무것도 준비 안 해가면 어리바리하다가 끝날텐데.' 하는 생각에 사전에 필요한 걸 예상해 보았다. 아무래도 결과물로 나올 문장이나 글귀는 내가 희망하는 것이겠지? 당일 그 결정에 고민이 길어져 난감해할 내가 눈에 선해서 미리 생각해 보았다. 
 

1. 알고 먹어야 더 맛있지.
2. 깊은 것을 유쾌하게
3. 대문호클럽
...

 
  첫날, 다행히 예상대로 모두에게 내가 작업할 문장을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다. 내 선택지는 위 세 가지. 단순히 마음에 드는 것을 취하기보다는, 결과물을 예상하면서 조형적으로 재밌어보이는 또는 안정적인 글귀를 고르는 편이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 오케이. 
 
  일단 대문호클럽은 글방 희영수에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후보에 넣었었는데, 정말 잘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라 좀 더 작업이 익숙해지고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지면 해보기로. 그리고 첫 레터링 워크숍이라 글자 수를 많이 가져가는 편이 더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나중에 꼭 그런 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음)에 일단 아웃. 그리고 '알고 먹어야 더 맛있지'를 해보려고 했는데 너무 일차원적이고 직관적인 문장인 데다, 조형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했다. 띄어쓰기를 여러 차례 넣어야 하고, 만약 생략할 경우 답답해 보이기도 할 것 같다. 글자수가 아홉인 것도 좀 애매해.
 
  반면 '깊은 것을 유쾌하게'. 역시 띄어쓰기가 있긴 하지만 2X4, 4X2로 예쁘게 조형을 할 수 있겠고. '깊', '쾌'라는 글자가 일상적이지 않아 재밌게 만들어볼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알고~'는 소비하는 문장으로 다가온 반면 '깊은~'은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레이어가 한 겹 더 있는 문장으로 느껴졌다는 점이 선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깊은 것을 유쾌하게'로 결정!
 
  '깊은 것을 유쾌하게'는 일본의 유명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남긴 말이다. 창작자로서 작업을 할 때 가져야하는 태도랄까. 그게 아니어도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 특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 생각하면 좋을 정신이 아니려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노우에 히사시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

 
  세 가지 다 그려보면 좋겠지만 선생님이 되도록 10자 내외의 문장을 추천하셨기 때문에(물론 당연히 넘어도 된다.)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문장을 꼽아보았다. 그리곤 앞으로 남은 4주 동안 작업하는 데에 길잡이가 될 무드보드를 만들고 발표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혼자 작업을 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워크숍의 장점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그 과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아 무드보드는 저렇게 만드는 거구나. 아 레퍼런스는 저렇게 찾는 거 구나...
 
  레퍼런스라는 건 아직 나한테 참 어렵다. 닿을 듯 말 듯한 단어다. 그런데 이미지 레퍼런스, 조형적 레퍼런스! 둘로 나누어 찾아보라는 설명을 들으니까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물론 여전히 어렵지. 그나마 조형적 레퍼런스는 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틀을 그릴 지에 관한 참고 자료니까. 그런데 이미지 레퍼런스는 여전히 좀 막막한 것이, 작업과정 중에 추구하는 이미지가 계속 바뀔 것 같고 지금 정해도 어차피 나중에 마음 가는 쪽으로 정해질 것 같아서 고민이 되었다.
 
  발표 시간 중에 인상깊었던 점은, 선생님은 물론이고 같이 워크숍에 참여한 분들 - 이미 디자인을 전공하시거나, 업계에서 활동하고 계심 -은 그 작업이 매우 익숙하다는 듯 비교적 명확하게 이미지 / 조형 레퍼런스를 잘 찾고, 그 까닭을 잘 설명한다는 점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라 넋 놓고 구경했던 것 같다. 나는 '한 영역의 대가가 주는 큰 가르침'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접근을 했고, '깊'과 '쾌'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글자에 주목했다.

아이디어 스케치

막연하게 그려보기

 
  첫 주차엔 과제 따로 없이 간이로 만든 ppt로 발표만하고 돌아갔다. 이 워크숍에서 하게 될 작업이 익숙한 사람,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5주 차 내내 집에서 따로 작업하지 않아도, 워크숍 시간만을 통해 작업을 완성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초심자라면 반드시 수업과정을 곱씹고 다음 수업을 위해 필요한 작업을 완수하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
 

✔️ 2주차 자모 그리기, 스케치 

  내 몇 안 되는 작업물을 생각해 보면, 그때그때 느낌에 의존에서 글씨를 그렸지 자모를 그리는 체계적인 밑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사실 이번 워크숍 중에 가장 새롭고 어려웠던 작업이 바로 자모 그리기였다. 애초에 글자 전체를 여러 차례 써보고 그 과정에서 전해져 오는 글자의 리듬이나 특징을 찾았었으니까. 그런데 기초부터 설계해 보는 거라 구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영 막연하고 어려웠다.

자모 그리기에서 퍼져버린 나

 
  주변을 슥 봤을 때는 다들 확실히 익숙한 듯 잘하고 계셔서 너무 신기했다. 디자인 짬이 있고 없고 가 역시 다르구나. 일단 연필 터치 자체가 결이 다르다. 나는 진하게 빡빡 눌러써서 옆으로 다 번지고 있잖아. 다른 분들은 세심하고 정갈하게 한 자 한 자 그려놓으니 일단 보기가 좋았고 통일성과 규칙이 벌써부터 느껴졌던 반면 나는... 음 이 날 좀 좌절했었던 것 같다. 
 

아.. 이거 어렵네.

 
  이 날 후반부엔 직접 방안지에 스케치 해보는 것으로 진도를 더 나갔다. 나는 자모음 그리기에 막막함을 느껴 일단 제쳐두고 바로 넘어갔다. 나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을 좋아해서 레터링도 그렇게 가져가고 싶었다. 근데 이 방안지 너무 좋다. 리갈 패드 방안지라면 마음껏 연습해 볼 수 있겠다. 막 쓰는 연습용으로 좋다. 지금 쓰는 방안지는 정말 포트폴리오용이라 막 쓰기엔 비싸고 아까운 종이지... 어쨌든, 이 날 스케치가 미숙했어서 도저히 디지털로 옮기기엔 곤란해서 한 주 동안 틈틈이 완성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저렇게 써보고 하나의 요소에 파고 들어가 보고 숨은 재미를 찾아보려고 하고. 그래서 처음엔 가로로 넓게 퍼진 글자들을 생각했는데 세로꼴 글자가 많은 이상 어렵겠다 싶어서 비율을 조정했다.
 

그냥 계속 써보고 스케치

깊에 사용된 곡선들을 쾌에도 적용해보는 고민고민

방안지로 옮겨서 적당한 비율을 찾아보기

 

✔️ 3주차 벡터화

 얼추 완성된 스케치를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스튜디오에 도착. 선생님 피드백 따라서 좀 더 다듬었다. 요건 요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디렉팅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조금 심심해 보이지만 진도가 늘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애매한 글자만 좀 반복해서 더 써보고 확정. 아직 스케치를 끝내지 못한 분들도 있어 얼마동안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나는 스튜디오의 스캐너로 스캔.

완성해간 스케치. 귀퉁이에 선생님이 주신 피드백을 적고 일부 수정을 해보았다.

 
워크숍에서 소개받은 글립스3 트라이얼 다운받아서 배경으로 스캔본을 두고 선 따기 작업 시작. 나름 작업의 순서가 있었던 것이 좋았다. 가령 가장 기초가 되는 ㅣ, ㅡ를 먼저 만든다던지 하는..

글립스를 처음 써보다... 소중한 1먼스 트라이얼 사용하다

 
일단 맛보기로 조금만 작업한 뒤 집가서 마무리. 그런데 글립스3의 펜툴이 일러 펜툴과 제법 다른 점, 까다로운 점들이 있었어서 정교하게 완성하지 못한 채로 우선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했다. 이때 얼추 작업 테가 나와서 뿌듯했었다.

글립스로 선따기. 글립스 너무 재밌고 좋아서 더 배우기 위해 사고 싶은데 299유로임.

✔️ 4주차 디테일 

  곡선 요소의 곡률을 통일감 있게 하는 작업, 어색한 부분을 바로잡는 작업 위주로 진행했다. 그리고 시각보정에 대해 배웠다. 꽤 중요한 영역이었다. 나는 무엇이든지 정해진 수치를 너무 중요시해서 수치가 통일되지 않거나 규칙에서 벗어나면 좀 불편해진다. 그런데 오히려 공들여서 수치를 아름답게 통일시킨 채로 디지털화했을 때 글자 여기저기서 어색한 지점이 속속들이 발견되는 경험을 해서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이런 시각보정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고 꽤 충격을 받았다. 시각보정 자체가 생소하다기보다는, 이렇게까지 주요하게 내 작업에 작용하는 경험을 처음 해봐서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스스로 구태여 규칙에 속박하려는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었다. 

깊과 쾌의 실선을 원형으로 바꾸고, 자간 조정 등등.... 여러가지 디테일한 시각 보정을 끝낸 후!

 
  시각보정 외에 이제 작업을 좀 더 풍부하게 해줄 변주. 나는 애초에 계획한 대로 '가르침'이라는 컨셉답게 급훈이나 교훈 같은 느낌을 주려 테두리에 장식을 해주기로 했다. 어떤 장식이 좋을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한정된 시간 내에 내가 만들 수 있을 법한 패턴을 찾아서 패턴 브러시로 제작했다. 세 가지로 만들었고 하나는 기본 테두리, 하나는 켈트식, 하나는 아르누보(?) 패턴.
 

 
 
 

✔️ 5주차 완성 후 재단 프린트

차이가.. 보이시나요 ?...

차이가 보이시나요 ? 2..

 
  나름대로 완성해가니 역시 내가 못 본 부분 봐주시는 선생님의 가이드에 따라 약간의 디테일 작업 추가(은 -> 은-> 은, 쾌의 원형). 결과는 꽤 맘에 든다! 훨씬 더 가독성도 좋고 밸런스도 좋아졌다. 테두리도 레터링과 조화롭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급훈 같다고 해주셨다.

 
  귀엽게도 각자 작업물을 적당한 사이즈로 편집해서 색지에 인쇄 후 재단해 나눠갖는 시간을 가졌다. 정작 예쁘게 재단한 샘플을 다 드려서 내 몫을 못 챙겼네. 다른 분들과 교환해서 또 즐거웠다. 와 그 기획이 이런 멋진 결과물이 됐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처음엔 검은 배경에 형광 연두색의 레터링으로 프린트하고 싶었는데 형광 계열 색지가 주황, 분홍 정도여서 눈에 더 잘 들어오는 주황으로 골랐다.

눈에 잘 들어오던 형광주황 컬러로 선택!

  
  사실 1주차 때 무드보드를 그려보면서 의도했던 바와 차이가 있다. 세로형이 아니라 가로형으로 완성되거나, '유쾌'를 한자로 그리지 못하기도 하는 등. 고민을 거듭하면서 여러 선택지 중 더 나은 것들을 추려가면서 결론에 도달하는 연습이 되었던 것 같다.
 
  워크숍 자체가 낯선 경험이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참여를 시작했었는데 다행히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서 기쁘다. 그리고 한글 레터링의 기초적인 과정을 5번의 수업을 통해 차근차근 익혀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특히 이전에 혼자서 해볼 땐 곡선 처리가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번 워크숍에선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곡선을 어떻게 다루는지 맛볼 수 있었다. 요즘 특히 현란한 곡선들이 춤추는 듯한 레터링들이 많이 보이는데 다른 분들의 그러한 작업을 옆에서 살펴보는 것도 즐거웠다. 이번을 계기로 나만의 작업들을 더 많이 선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