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야 고맙고 미안해

 

 

 

왕십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교통 요충지? 아니면 곱창인가요? 김흥국입니까? 이제 김흥국은 뺍시다. 아무튼 저는 1999년부터 왕십리 주변에 살았습니다. 대충 따져도 20년이 넘네요. 근데요, 저 여러분께 푸념 좀 하겠습니다. 왕십리 주민들이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온 우주가 ‘괜찮은’ 카페와 식당의 왕십리 입성을 막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주는 좀 과장이고 적어도 암흑의 세력의 존재는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커피에 눈 뜨고 친구들과 카페에 들락날락하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땐데요. 아메리카노에 눈 찌푸리고 겨우겨우 설탕시럽 타 마실 때니까 커피 맛은 당연히 잘 몰랐을 거고, 그저 제대로 된 카페라면 오래 앉아 떠들 수 있는 푹신한 소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카페를 골랐던 때였네요. 그러다가 ‘맛집’이라고 부르는 곳들이 지금과 다르게 진짜 ‘맛집’이었을 때, ‘핫플레이스’라는 곳들이 가로수길, 명동, 대학로, 강남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왕십리에도 어쩌면 우리 가족이 모르는 그런 곳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네이버 블로그에 동네 식당 정보를 검색해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냥 가까워서 자주 갔던 만두전골집이나, 무슨무슨 가든이라고 이름 붙이면 다 되는 건 줄 알았던 고깃집, 입학식, 졸업식 때 가는 피자헛 같은 곳 말고요. 시도가 무색하게 남은 것은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때도 이미 왕십리에는 뭐가 너무 많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1세기가 되고도 사반세기가 지난 2025년쯤되면 그래도 괜찮은 공간이 생길 법도 한데요. 여전히 이 동네 최고의 카페는 스타벅스고, 최고의 식당은 맥도날드입니다. 프랜차이즈와 가맹점 사이 간신히 자리 잡은 개인 카페들과 식당들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인테리어부터 외관, 메뉴와 가게 이름, 소셜미디어 계정의 말투나 운영방식까지, 단순히 잘하는 곳의 그것들을 답습한 듯한 모습이어서 따분합니다. 투덜투덜 대지만 막상 저를 거기 앉혀놓으면 뭐든지 맛있다고 잘 먹긴 할 겁니다. 그렇지만 한 번 가고 말 곳이 아니라 제가 단골이 되고 싶은 가게가 없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십리가 사통팔달의 대명사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님에도 이 지역에 번화가에서 볼법한 식공간이 들어서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지 무척 궁금합니다. 번지르르한 컨설팅 회사에서 내놓은 왕십리 상권 분석 리포트가 있다면 무리해서 훔쳐보고 싶어요.

 

서울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일단 왕십리에도 사람이 많습니다. 역 근처에서 자취하는 한양대생들부터, 행당 - 응봉 - 상왕십리 - 사근 구역의 드넓은 오피스텔, 빌라, 아파트 숲에 엄청난 수의 가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회사도 많아 유동인구 무시할 수 없고요.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만족시키려면 분명히 보통 수준의 요식업체는 경쟁에서 밀려나기 마련일텐데 왕십리는 어째서 약자들까지도 평화로운 묘한 유토피아가 되어버린 걸까요. 철저하게 ‘주거 지역’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고수하려는 것인지? 아무래도 한편으론 워낙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대중교통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번화한 곳이 많으니 왕십리 주민들이 그들의 본거지에 애초에 기대를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왕십리는 곧 ‘집은 잠만 자는 곳이다’, ‘동네에선 요기만 간단히’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마을인 거죠. 하긴 성수, 압구정부터 한남, 종로와 을지로가 30분 이내 거리에 있으니까요. 울타리 바깥에 과일나무가 득실득실한데 굳이 안에서 풀만 뜯을 필요는 없겠네요. 아니면 워낙 요식업 불모지의 경향이 예전부터 짙었으니 누군가로부터 타산지석 삼아 왕십리 진출 자체를 시도하지 않으려 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참으로 든든한 그 어둠의 세력들도 한 번 쯤은 실수하지 않으려나요…. 어이쿠 너무 힙한 카페를 만들어 버렸네, 어이쿠 너무 줄 세우는 식당을 들였네, 하면서요. 저는 그래도 푸근 담백한 곳이 좋습니다. 뭐든 좋으니 멀리서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선뜻 데려가고 싶은 곳이 나타났으면. 적다 보니 식물성 휘핑크림에 축축해져 버린 탐앤탐스 허니버터브레드가 먹고 싶어 지네요. 이래서 어쩔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