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기구해지지 말기

운명에 관한 생각을 정신없이 늘어놓겠다. 읽는 이들은 게슈탈트 붕괴에 주의하시오. 

 

    자고로 뭇사람의 운명은 애당초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이 말에 동의한다. 그렇게 믿는 쪽이 편하다. 그래서 굳이 고르라고 하면 나는 운명론자다. 내가 이 늦은 새벽까지 운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내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글쓰기의 샘이 고갈되어 전부 내팽개치고 싶어질 때, 실제로 쓰던 글을 던져버리고 침대로 향한다면 그것도 나의 운명이고, 처연한 욕심을 삼키고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금요일 저녁 글모임에 참석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운명에 관한 글쓰기를 두고 두 가지 경우로 나누는 행위조차 미리 정해져 있던 운명이 뿌린 자잘한 부스러기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지금 읽고 있다면, 그건 당신 몫의 운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할까? 실망시키지 않고, ‘그것도 운명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운명을 믿지 않도록 미리 점지되어 있었다.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마음가짐 역시 그 사람의 운명이 이끌었다. 운명을 믿지 않을 운명이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지독한 운명론자인가? 

그런데 내가 운명론자든 아니든 따지고 보면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또는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일어날까, 하고 절대자를 원망하고 싶다면 그저 운명이오, 나의 업보니. 하고 넘겨버리면 속 편하다. 

 

    그래서 다시 정리. 

1. 운명론자; 운명에 순응할 경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여 여러 선택을 내리지만, 사실 그렇게 선택을 하도록 우리는 애초에 설계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해진 운명의 길을 걸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 자신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의 미약한 존재라고 편하게 인정한다. 무력해 보일지 몰라도 달라질 것? 전혀 없다. 고민은 할지언정,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여긴다. 선택이 불러온 눈앞의 결과가 당장 좋지 않아도, 밑거름이 되어 어떤 식으로든 이후에 도움이 된다고 받아들인다. 

 

1. 내가 운명을 부정할 경우.

    운명을 거역하려고 한다. 운명의 존재를 부정한다. 운명의 마수로부터 끊임없이 발버둥 친다. 결과는 둘 중 하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벗어나는 데에 실패하거나. 벗어난 경우, 고생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생각하고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즐기면 된다. 칠전팔기에도 불구하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에 실패했다면 그제서야 순응하며 깨닫는다. I로 생각을 바꾼다. 아, 결국 이럴 운명이구나. 

 

    그러니 진정 ‘기구한 운명’을 논한다면, 운명을 믿느냐, 거역하느냐,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를 두고 쓸데없이 설왕설래하는 인생 아니려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게 바로 기구한 삶이다. 그러다 아주 만약에 어찌저찌 무엇이 먼저인지 각고의 노력 끝에 답을 얻었다고 해도, 그마저도 그 사람의 운명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명제는 내가 앞으로 더 이상 운명에 대해 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 이 정도쯤 되면 오히려 한끗차이로 운명 무용지물론자 아닐까. 거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의식하지 말아 버리자. 다 운명이다, 하고 받아들이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하며 괘념하지 않아도 된다. 혹시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까? 눈살을 찌푸려지는 글이었다면, 미안합니다, 이 또한 당신과 내 운명이오. 자고로 뭇사람의 운명은 애당초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이 말에 동의한다. 그렇게 믿는 쪽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