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집합과 차집합

이거 디자인만 좀 더 좋았었다면

  ddp 개관 10주년 기념 특집 강연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집합과 차집합》에 다녀왔다. 인스타그램 광고가 엄청 떴었다. 메타 프로모션 타겟 중 어떤 쪽에 내가 걸렸을까 궁금했었는데, 슬기와민, 신신이 연사로 등장하여 각각 세션을 맡았다고 하여 오래 망설이지 않고 신청. 마침 초가을에 방문했던 매거진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강연이기도 하고, 참가비도 따로 받지 않아 부담 없이 참석했다. 시작하기 15분 정도 전에 도착해서 막 줄이 생길 때 입장했는데 나중엔 줄이 길어져서 행사 시작이 20분정도 지연되었다. 입장 시 커피와 다과 센스에 감동.

 

  강연은 두 개의 부로 나누어져 1부에 슬기와민이, 2부에서 신신이 이끌었다. 두 팀에서 그동안 해온 작업들을 소개하고,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이렇게 결과가 나왔는지를 설명하는 식으로 강연이 진행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그래픽 디자인 관련 세미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앞으로 비슷한 자리가 있으면 부지런히 참여해야겠다. 미리 질문들을 생각해도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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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말로 하기는 어렵다 Words don’t come easy

슬기와민 (사진 박순애)

  슬기와민은 그들의 아카이브에서 대체로 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사전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검색해보자, 우리는 말과 글을 예측에서 벗어나도록, 때로는 이상해 보이도록 만드는 시도들을 해오고 있다 정도의 말들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 그자체가 이미지가 되어버리거나, 이미지가 아예 없는 작업, 장소 특정적인 말, 말장난 등에 해당하는 작업들을 설명과 함께 소개했다.

  모든 작업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EXD’11 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한 로봇 신호수  《어서 오세요 / 안녕히 가세요 / 어서 오세요 / 안녕히 가세요》였다. 작업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쌓여가는 생각의 층위들이 멋있었다. 왜 광장에 환영 인사와 작별인사하는 사람을 두기로 했는지, 왜 사람이 아니라 로봇 신호수를 광장에 배치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옷을 입혔는지, 그 옷의 패턴은 어떻게 해서 결정되었는지 등등의 이야기들이 듣기 좋았다. 강연장에서  발화되면 그저 한 토막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엔 수많은 의견 충돌과 비용과 스트레스, 노심초사가 녹아있었지 않았을까. 

《어서 오세요 / 안녕히 가세요 / 어서 오세요 / 안녕히 가세요》 - 슬기와민(https://www.sulki-min.com/wp/bem-vindo-adeus-kr/)

이곳/저곳 (https://www.sulki-min.com/wp/here-there-kr/)

  이왕이면 그날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최대한 수첩에 강연 내용을 받아적으려 했다. 그러나 말의 속도를 필기로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간혹 놓친 부분이 있어 아쉬웠는데 다행히 슬기와민 웹사이트에서 각각의 작업들과 강연 때의 설명이 더해져 아카이브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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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화원

스튜디오 신신. (디자인 프레스, 사진 임상현)

  신신은 세션을 두 개로 나누어, 파편적인 생각들을 조각 모으듯 작업한 포스터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포스터를 넘어서 더 다양한 매체에 그들의 아이디어를 적용한 사례도 함께 소개했다. 전자에서는 《참참참》, 《군산회관 사용법》, DJ YESYES(박다함)와의 작업 등을 선보였다. 《능수능란한 관종》 관련 작업에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호기심으로 완성한 작업은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되는지(예: 두 가지 기능을 가지는 포스터)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후자에서는 《헤어질 결심》 LP,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 세종문화회관 아이덴티티 작업, 《신양장표음》, 그리고 《핸들-북 클래식》 사례를 통해 신신만의 발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깊은 사고의 확장까지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

@hwawon_mediabus

  신신 강연의 종착역은 ‘화원’이었다. 화원은 그들의 출판사다. 어느 덧 6권 정도의 책이 나왔다. 로고 심볼은 꽃표(*)로, 지금까지 책등에 나온 심볼의 모양이 각각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로고 타입이 유기적으로 바뀌는 것이 좋기도 하고, 화원의 책을 한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두면 그자체로 꽃밭(화원)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물론 각각의 책을 그러모아도 그들의 화원이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업은 《신양장표음》.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체 연구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단순히 글꼴을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각 글자를 오선지 위에 올려 음악성까지 부여해보는 아이디어가 너무 흥미로웠다. 매체의 경계를 허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주었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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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강연자 모두 각기 다른 매력과 성향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모두 명석했다. 자기 작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 이해가 분명했다. 작품 설명에 대한 고민은 제작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한 것처럼 말씀도 다들 너무 잘하시고.

2.  공부를 하며 알게 된 개념이나 인물들, 단어들이 강연자의 입으로 발화되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하다못해 ‘산세리프’ 마저도… 

3.  QnA 때 누군가가 그래픽 디자이너의 워라밸에 관한 질문을 했다. 이에 신동혁님은 그런 개념을 모른 채로 지낸다는 답변을 했다. 잘 살아있는 걸 보니 밸런스가 맞는 것 아니겠냐는 우스개소리도. mbti든, 워라밸이든 어떤 틀로 만들어진 개념을 안 믿는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하루만 놓고 보더라도 아침은 예민하고 점심 때는 느긋해지는 게 본인이라는 말을 듣고선 최근 읽었던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인물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지. 굳이 어떤 틀에 날 가둘 필요 없지.

4.  네 분의 연사 모두 본인의 작업이 아니라 상대팀의 작업을 가져와 발표 때 예시를 들거나 QnA를 진행하는 기민한 말하기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일례로 최성민님은, ‘AI시대에 다가올 그래픽 디자이너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AI, 걱정마시라. 인류의 위기이지 디자이너의 위기는 아니다. 그냥 잘 배워서 쓰시길. 그런데 한 가지. AI는 우리의 시간을 아끼는 쪽으로 개발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응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방법을 취할 수 있다. 신신의 《참참참》이 지난 작업들을 잘게 조각내고 오려서 새롭게 조합한 작업이었는데 물성도 재미있지만 더 재미있는 건 그 작품 속에서 시간이 느껴지는 것. 거기에 투여된 노동의 시간이 전해져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AI가 시간의 단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린 오히려 그 반대를 노릴 수 있지 않나. 그 과정에서 AI로 누끼를 딴다든지(좌중 웃음)를 충분히 활용하면 될 것 같다.

  최슬기님은 이렇게 답했다.

  “신신의 《핸들-북 클래식》은 도서의 형태를 가진 작업인데 이것을 활용한 영상을 만든 점이 특이하게 다가온다. 독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고 감동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어떻게 이것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답을 찾아가다 보면 AI는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대응하는 전략은 잘 모르겠고, 좋아하면 계속하시라!”

  위 질문에 대한 신신의 답변도 물론 다 좋았다. 신동혁님은

  “사실 잘 모른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단순한 기계작업에 적용되는 효율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린 그 반대에서 가치를 찾자. 알고리즘이 당황할 만한 변수를 끝없이 던지고, 그 AI에 대응할 답을 꾸준히 찾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해옥님은

  “우리의 입장은 보고, 즉각 반응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된다는 것. 소모적으로 스크롤하고 좋아요 누르고 끝내지 말고, 지금 눈 앞의 컨텐츠가 어떤 점이 좋고 어떻게 특별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보고 적어두어야 한다. 이게 쌓이면 AI에 대응할 만한 무기가 되지 않을까. 긴 캡션을 써보고, 왜 이 이미지가 좋았는지를 계속 기록하자. 이런 게 중요한 것 같다. 이것은 무엇이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지 나 스스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특히 신해옥님의 멘트는 내가 이 계정의 소개글에도 적어둔 ‘뭐가 좋은데 왜 좋은지’와 궤를 같이하여 감명 깊었다. 애인이 격려의 마음으로 나에게 건넨 이 문장이 한층 더 특별해지는 순간.

5.  내 작업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작업에 대해서 질문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6.  이번 강연을 통해 마음 속에 떠오른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집합이란 아래와 같다.

• 많이 읽고 보고 듣고 배우고 감각하고 맛보고 만들고 찢고 버리고 만나고 겪고…
• 1.을 통해 내 것이 된 것들. 머리 속에서 그것들을 재조합하여 지금 프로젝트에 필요한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물론 이 재조합은 ‘재조합해야지!’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늘 저녁 메뉴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 구상한 이미지에 가깝게 손 끝과 입 밖으로 재현해낸다. 
• 도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므로, 무엇이든 잘 다룰 줄 알면 유리하다.
  

7.  차집합은 나만의 절차탁마로 차별점과 특이점을 만들어가는 것.

 

여담

1.  마이크로 다들 이야기 했음에도 음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200명이 강연장에 있었기 때문에 뒷 좌석에 앉은 참석자들은 아마 강연자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2.  키노트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사진 촬영음이 대부분 또롱 또롱 하는 라이브 포토 촬영음이었다. 찍을 때 조금이라도 조용한 소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합의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찰!!칵!!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또롱~ 또롱~ 하니까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강연장에 왠지 모를 생동감이 깃드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3.  최근 들어 더 느끼는 거지만 슬라이드나 발표자료 만들 때는 애플 키노트를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어쭙잖은 템플릿 활용하는 것보다 이번 강연에서 볼 수 있었듯, 담백한 바탕과 기본에 충실한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하는 쪽이 훨씬 흡인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