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노트 읽기 02. Duke Pearson -「It Could Only Happen With You」

2008년 무한도전 <베이징 올림픽 특집> 배드민턴 편에서 잔진의 손에 빨려들 듯 날아온 셔틀콕처럼 나도 모르는 어느 새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봄. 온화해진 날씨에 따뜻한 커피와 함께 하기 좋은 앨범을 소개하고자 이번 글을 쓴다. 

당장 액자로 걸어놔도 좋을 아름다운 커버.

 
Duke Pearson(듀크 피어슨)은 블루노트 레코즈에서 활약한 미국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 프로듀서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본명은 원래 Duke가 아닌데, 어릴 적에 피아노를 너무 잘쳐서 듀크 엘링턴의 Duke를 딴 별명으로 불려 이후 활동명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것치고 피어슨이라는 성과 굉장히 잘 어울려서 내가 듣기엔 그 홀네임이 아주 멋지게 들린다.

듀크 피어슨

내가 듀크 피어슨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로는 그의 크리스마스 앨범인 「Merry Ole Soul」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크리스마스 테마들을 우아하고 경쾌하게 소울-재즈로 편곡해낸 앨범이다. 일일이 구별하긴 어렵지만 아직까지도 시즌이 되면 숱한 크리스마스 재즈 플레이리스트에서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심심치않게 들을 수 있다. 앨범 커버엔 산타옷을 입은 본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메고 있는 보따리 속 선물 틈바구니에 키보드가 끼어있는 게 정말 어이없고 웃기다. 그렇게 알게된 그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앨범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도, 블루노트에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한 앨범이다. 브라질을 필두로 하는 라틴계 음악과 미국식 재즈를 마스터의 손길로 버무려냈다. 음악마다 고유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앨범은 지나쳤을 때 그 누구든지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섬유유연제의 향을 가졌을 것 같다. 
 
따뜻해진 날씨가 반가워진 김에 LP장에서 꺼내 재생해 보고 내용이 궁금해져 라이너 노트를 다시 한 번 해석해보았다. 여기서는 각 문단의 시작부분에 이 앨범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단어를 한 번씩 외치고(?) 있다. 이 단어들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시대가 이 앨범과 아티스트를 어떻게 바라봤을지를 유추해보면서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길지 않은 분량. 아쉽지만 누구의 글인지는 적혀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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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

Flora Purim의 대지와도 같은 목소리와 Duke Pearson표 피아노 연주가 자아내는 보들보들하고 살랑살랑한 라틴 재즈 선율을 잘 들어보면 브라질 리우의 푸르른 만이 내려다 보이는 선선한 언덕만큼 햇살이 아름답게 부서지는 경쾌한 음악이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잠들어 가로등 불빛만이 반짝이는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어느 고급아파트처럼 시크하면서도 매혹적이다. 다른 연주자들도 수 차례 시도해왔지만 Duke Pearson은 남미 음악만의 애석하고 홀릴 듯한 멜로디와 세련된 현대 아메리칸 재즈의 조화로운 블렌딩을 완벽하게 해냈다.
 

컨티넨털 !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우린 남미의 라틴 축제에서 유연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는 구릿빛 피부의 라틴 여성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 와중 바로 건너편 테이블엔 빨간 가운을 걸치고 있는 뉴욕 여성이 샴페인 잔을 천천히 굴리고 있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짓자 드러난 치아는 시가렛 홀더의 아이보리색 팁을 물고 있는 듯하다 ..
 

스타일 !

Duke Pearson은 오랫동안 그의 빅밴드 어레인징, 재즈와 라틴 재즈 작곡 능력, 피아노 연주 솜씨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번엔 우리를 모두가 바래왔던 쿨하면서도 편안한 세계로 안내한다.
 

인터내셔널 !

1번 트랙 "Round and Round"은 보사-블루스 음악으로, Flora의 정겨운 브라질어(원래는 포르투갈어가 맞지만 브라질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포르투갈이 곡에 기여한 바가 0이기도 하고.)가 곁들여진다. 그녀는 마치 휴일을 만끽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아이들처럼 가볍고 춤추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간주에 들리는 테너 색소폰 솔로는 아메리칸 재즈란 이런것이다! 라고 외치며 새처럼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듯하다. 이에 병행하는 Duke의 일렉트릭 피아노 솔로는 몬터레이에서 Count Basie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유머와 절제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하다.(무슨 뜻인지 너무 궁금해.)
 
Flora는 "It Could Only Happen With You"에서 라틴의 연인들처럼 속삭이듯이 노래한다. 들어보자. 그녀는 지우베르투가 그토록 꿈꿔왔던 여우 그 이상이다.(이것도 무슨 뜻인지 너무 궁금하다.) 이어서 클래식이 된 "Stormy"에서 그녀는 떠나보낸 사랑에 대해 울부짖는다. 우리는 다들 그래본 것처럼 그녀를 따라 울게 되겠지. 
 
"Hermento"에서는 Duke가 다시 일렉피아노를 연주하고, "Book's Bossa"와 "Emily"에서는 어쿠스틱 피아노를 연주하며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네 곡의 연주곡 중에서는 "Lost In The Star"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트럼펫과 테너 색소폰의 끊김없는 연주 뒤로, Duke는 소리로 한 폭의 태피스트리 페인팅을 펼쳐낸다. 몽환적이고 느긋한 연주를 들려주는 "Lost In The Star"는 그리움의 아픔과 부드러움을 담은 마스터피스다. 
 
색소폰, 트럼펫, 플루트 주자를 한 명씩만 두고도 Duke는 이 앨범의 모든 곡에서 빅밴드의 색채와 힘을 가진 듯한 혼(horn) 라인을 자유자재로 짜냈다.
 

음악, "Sheer Music" !

Flora Purim의 허스키하면서도 젠틀한 보컬, 불꽃처럼 타오르다가도 차분해지는 솔로 연주, 현혹될 정도로 간단해보이는 브라스 어레인지. 끊임없이 강하면서도 매혹적인 남미의 리듬 섹션까지.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가볍게하는 라틴 음악의 선율, 그리고 감각적인 아메리칸 재즈는 당신에게 리치하고 강력한 'Musical Liquor'를 한 모금을 선사할 것이다. 바로 다가올 당신의 오후를 사랑에 딱 한 번 더 빠지게 할 완벽한 오후로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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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의 창작물을 두고 이렇게까지 비평을 해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만 중간에 몬터레이에서의 카운트 베이시, 지우베르투와 여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당연히 저 당시에 살며 문화를 향유하던 사람이 아니기에 맥락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구글이나 chatGPT도 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수록된 곡 중 'Stormy'는 원래 Classic IV라는 밴드의 곡을 재해석한 곡이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블로그의 첫번째글에서 소개한 Santana의 「Inner Secrets」 에 수록된 'Stormy'도 같은 곡이었다. 각각 별개로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번 기회로 멜로디라든가 일부 가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리게 되었다. 아마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리메이크한 Stormy를 듣는다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겠지. 그러면 '엇 이 곡은?'하면서 누군가가 궁금해한다면 기꺼이 설명해줄 수 있을 듯하다. 한 곡을 두고서는 서로 다른 재해석이 쏟아지는 사례들. 현대 음악에서는 역시 이런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참 남다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