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타이거 디스코」 와 '우리 둘이서'

바 「타이거 디스코」를 3층에 품고 있는 건물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을지로3가역 10번출구에서 나와서 단 3초만 걸으면 된다.  제법 경사가 가파른 계단 여러 개를 오르고 한 번 더 오르면 여기가 맞나 싶은 곳에 '타이거 디스코'라고 적힌 간판이 작게 걸려있다. 「타이거 디스코」는 동명의 디스크 쟈키이신 사장님께서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바이닐 믹싱을 들으면서 각종 위스키와 하이볼, 칵테일,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곁들일 수 있는 훌륭한 바(bar)다. 
 
협소하고 좌석도 많지 않지만 「타이거 디스코」엔 디테일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80/90년대의 클래식한 디테일.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 시대를 2023년에도 몸담고 잠시라도 살아볼 수 있는 곳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하는 디테일에 어이가 없어 이내 터져버리는 웃음. 나는 그런 것에 미친 듯이 끌린다. 그렇게 맥빠지게 웃고 난 뒤엔 한참 지나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피식하고 웃음을 나오게 하는데, 「타이거 디스코」에는 다른 업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포인트들이 너무 많아 다시 발걸음을 이끄는 것이다. 이게 바로 멋이지. 어쩌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9시 남짓 입장해서 마감시간인 11시까지 2시간 정도 이 곳에 머물면서 내가 느꼈거나 들었던 생각을 시간 순서대로 주욱 나열해보면서 이것 저것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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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판이 사라지고 웬 흰 종이에 손글씨가 간판을 대신하고 있네. 참 이것도 여기 답다.
 
... 토요일 저녁이라 자리가 혹시 없으면 어떡하지? 음악 듣고 위스키 한 잔 할 곳이 주위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만한 곳이 없을텐데. 
 
... 끼이익(문 여는 소리) 이것도 참... 진짜 여기 답다.
 
... (바글바글)
 
... 오늘은 사람이 많구나. 만석 같은데 역시 토요일 저녁이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
 
보통 문을 열자마자 사장님(타이거 디스코)이 후다닥 마중나와서 인원을 물으시거나 이용규칙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시는데 마침 하던 일을 멈추시고 내게 오셨다. 
 
"몇 분이시죠?"
 
"한 명이요."
 
"가운데 자리로 앉으시면 됩니다."
 
... 다행이다.
 
다른 손님에게 가려져 안보였던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 벽을 보고 앉는 곳이 아닌 사장님과 마주보는 바의 가운데 자리다. 출입구 바로 옆에 옷장이 있으므로 목도리를 풀고 외투를 벗었는데 남는 옷걸이가 잡히는 게 없어서 음, 하고 자리로 가서 의자를 빼 옷을 걸었다. 양 옆에 사람이 있었다. 간격이 넓지 않기에 접촉에 주의하며 최대한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 그러고보니 이제 규칙이 없어졌나? 오늘은 사장님이 별다른 언급을 안하시네~
 
하는 순간 어김없이 내게 건네지는, 바 이용 규칙이 적힌 진지한 문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술 취한 사람 입장불가입니다.', '3인 이상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신청곡 안받습니다.' 따위의 기본적인 규칙이 우선 생각난다. 그리고 만약 사장님이 그만의 고집과 신념이 확고하다는 배경지식이 없는 채로 처음 이 공간에 온 사람은 다소 의아하거나 섭섭할 수 있는 규칙들도 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대화 소리를 크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든지,  '사장님은 기본적인 접객과 응대 외에 사적인 이야기에 응대해드리지 않는다.'와 같은 뉘앙스의 규칙들. 원랜 사진 촬영도 삼가달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거참 하지말라면 하지말지 다들 몰래몰래 찍어서 그런가 하도 요구해서 그런가 '사장님과 다른 손님들이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촬영을 허용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 계속해서 규칙이 업데이트 되는구나. 역시 손님과 사장님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간 운영을 계속 신경쓰시는 걸까~.
 
규칙이 빼곡히 적힌 그 파일을 가져가시고 메뉴를 건네받았다.
 
... 이전 방문 때 품절이어서 마실 수 없었던 히비키를 오늘은 꼭 마시리라.
 
하며 메뉴를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나의 시야가 포착한 히비키!
 
... 야호 ! 
 
주문을 위해 앞에 계신 사장님께 눈짓했다.
 
"니트(물이나 얼음을 섞지 않고 그대로)로 히비키 한 잔 주세요."
 
"옙. 알겠습니다."
 
주문하고 나서야 지금 플레이 되고 있는 앨범이 귀와 눈으로 들어왔다. 눈으로도 들어올 수 있는 이유는 LP장 옆에 앨범 커버를 올려 둘 수 있는 스탠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총 2개가 위 아래로 벽에 붙어있는데 위 쪽 스탠드에 현재 재생중인 앨범을, 아래 쪽 스탠드에 다음에 재생할 앨범을 미리 올려둔다. 'Now playing', 'Next is...' 를 알려주는 친절한 약속이다.
 
<보디가드> OST였던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다음 재생될 앨범 커버도 영화 OST앨범이었다. 이윽고 더운 물에 젖은 코인 물티슈, 초코 시럽과 휘핑크림을 얹은 크래카(이 곳에서는 왠지 크래커보다는 크래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얼음 동동 띄운 구수한 '보리차'가 재빠르게 서빙되었다.
 
... 아 내가 성격이 너무 급해서 코인 손수건이 더운 물을 충분히 빨아들이기 전에 펼쳐버렸네.
 
대충 손을 슥슥 닦고 다시 내려놓을 무렵 히비키는 스템이 있는 글랜 캐런잔에 담겨 나왔고, 사장님은 히비키 라벨이 내 눈에 잘 보이도록 가지런히 병을 잔 앞에 놓아주셨다. 저번엔 잔이 스템이 없는 버전이었는데 아무래도 새로 교체하신 듯하다. 히비키는 위스키가 익숙하지 않던 오래 전에 마셔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코를 갖다대보았다.
 
... 달다!
 
달달한 향을 감지했다. 초콜렛 계열이었다. 내 후각은 정말 형편없는 편에 속하는데 그걸 뚫고 들어올 정도의 진한 내음이었다. 얼마 안가 후각이 제 능력을 다해서 이번엔 반의 반 모금을 들이켜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 달다! 부드럽다! 진짜 부드럽다!
 
원체 부드러운 히비키였을텐데 에어링도 꽤 많이 진행되었겠다 싶은 부드러움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병을 보니 남은 위스키가 거의 없었다. 이걸 따르면 30ml가 나올까? 하는 정도의 양.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라이온킹의 OS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버에 적힌 영화 이름이 한글로 되어있어서 예상을 했어야하는데, 뜻밖에도 한글로 된 테마곡이었다. 아마 더빙 버전에 수록되었겠지.
 
... 7인치 앨범이 많아졌네.
 
편안히 눈을 내려놓은 곳에 수북히 쌓인 7인치 앨범 더미들이 보였다. 훑어보며 크래카를 와작 깨물었다.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질까봐 접시를 받쳤다. 사장님은 뒤돌아서 LP장을 보며 다음 곡을 고르고 있었다. 
 
... 어떤 노래를 틀으시려나.
 
사장님이 이내 꺼내드신 앨범은 배인숙의 「창부타령」 ! 여기에 '우리 둘이서'가 수록되어있다. 

창부타령. 82년 앨범으로 비트볼레코드에서 재작년에 리이슈 제작!

레게, 아메리칸 팝과 가요, 민요를 넘나드는 다른 수록곡들도 훌륭하지만 사실 이 한 곡을 위해 위 앨범이 재발매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 둘이서'는 「창부타령」의 킬러트랙이다. '우리 둘이서'는 'Just the two of us'를 번역한 제목인데  'Just the two of us'는 다들 잘 아는 그 유명한 노래(빌 위더스와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로, 이걸 배인숙 선생님이 다시 부른 곡이 '우리 둘이서'이다. 들어보면 놀랍도록 가사를 잘 옮겨왔고 연주도 너무 세련됐다. 무엇보다 그녀의 보컬이 너무 쫀득해서 노래의 무드와 환상적으로 잘 어울린다.
 
「타이거 디스코」에 방문할 때마다 백이면 백 사장님이 꼭 한 번은 트시는 걸 보면서 사장님의 최애곡 중 하나일 것임을 확신했다. 심지어 '배인숙 우리둘이서'를 유튜브에 검색하면 사장님 영상이 관련영상으로 같이 검색된다. (😂) 해당 영상을 보면 비트볼 레코드에서 이 앨범이 재발매된 이후로 DJ들은 앞다투어 원곡과 배인숙 버전의 '우리 둘이서'를 순서대로 믹싱했지만, 타이거 디스코는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해온 듯하다. 재발매에 타디의 지분이 꽤 비중있을 듯 싶다.
 
워낙 명곡이기에 'Just the two of us'는 정말 많은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타이거 디스코」에서는 아니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는 버전까지 믹싱되어서 이어서 들어볼 수 있다. 저번에 갔을 때는 90년대 한국 남자그룹이 부른 뉴잭스윙 버전의 'Just the two of us'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윌스미스 버전이... 그것도 윌스미스가 벌스에서 랩하고 후렴은 한국어 가사로 한국인이 부른 곡이었는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허탈해 계속 웃으면서 노래를 들었다. 찾아보니 !!!
https://youtu.be/-0flyGmfOvU

ㅋㅋㅋㅋㅋㅋㅋ 야ㅠ 진짜 이걸 어떻게 LP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윌스미스가 '너와나! 너와나!'하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다. 제이든 아버지... 소싯적 타국에서 고생 많으셨소.
 
정말 혀를 내두르는 사장님의 덕력에 이 날도 흠씬 두들겨맞은 기분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버전의 'Just the two of us' 피지컬 앨범을 모으셔야 만족하실런지. 그러면 나중엔 같은 노래들로만 1시간 믹스 찍으시겠지... 나 오늘부터 기도한다.
   
그렇게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주방에서 뚝딱뚝딱 뭔갈 준비하시더니 작은 접시에 무언가를 담아 나와 옆자리 손님들에게 차례대로 서빙해주셨다.
 
"감자샐러드입니다. 위에 있는 명란 마요와 달래, 베이컨이랑 잘 섞어드시면 됩니다."
 
...이렇게 훌륭한 감자샐러드를 내어주는 바가 또 있을까?
 
사장님 말씀대로 잘 섞어 먹었는데 정말 너무 맛있었다. 정확히 설명하면 감자와 달걀이 섞인 샐러드였다. 간도 알맞고 향도 감자깡이 떠오를 정도로 아주 생생했다. 과연 전직 호텔 한식조리사라는 경력이 두드러지는 대목이었다. 이어서 중경삼림과 화양연화 OST를 지나면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남은 히비키를 입에 털어 넣고 다음 잔을 주문. 
 
"라가불린이랑 아드벡 우거다일 중에 더 최근에 오픈한 게 뭐예요?"
 
"라가불린입니다."
 
"그걸로 한 잔 주세요!"
 
"니트로 드리면 되죠?"
 
"네."
 
그동안 노래는 조슬린 브라운의 너무너무 신나는 'Somebody else's guy'로 넘어갔고 서빙받은 라가불린(8y)은 여전히 일당백이고.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을 나는 정말 가만히 앉아서 아무도 모르게 신나하고 있었다. 이 다음 재생하려고 사장님이 골라둔 앨범은 Maze의 6집이다 ! 프랭키 베벌리의 The Maze의 히트곡과 앨범들을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마침 내가 들어보지 않았던 앨범이었다. 아티스트로 보나 사장님의 픽으로 보나 다음에 어떤 곡이 나와도 훌륭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할 뿐이었다. 차례차례로 김현철 메들리가 나오면서 나는 감자샐러드를 박박 긁어먹었고, 사장님은 보리차를 리필해주셨다. 마지막 곡으로는 오아시스의 샴페인 슈퍼노바. 정말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닐 수가 없다.
 
11시가 되기 전 5분을 남기고 계산을 마치고 건물을 나왔다. 결제하시면서도 기름기 쫙 뺸 담백한 응대. 감사합니다. 깜빡하고 최근에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을 왜 닫으셨는지 못 물어봤다. '애월의 노을'이라는 믹스를 좋아했는데 요즘 못 듣고 있다. 다음 번엔 꼭 문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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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수가 극히 적은 이유는 역시 사진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곳에 대해 돌아보기에 좋은 것 같다. 다음 번 타디바 방문에도 같은 식으로 일기를 써야겠다 ㅎㅎ

「타이거 디스코」올라가는 계단. 저 어이없는 위치에 붙어있는 거울이 난 너무 웃기고 좋다.

저 필체도 어이없지만 좋다. 간판을 교체한 것이 아니었다니...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