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는 램지 루이스와 함께.

  최근 들어 써낸 글들은 다시 읽어봐도 영 재미가 없다. 문단을 하나둘 읽고 나면 머지않아 집중력이 흐트러져 휘적휘적 아래로 스크롤한다. 첨부된 사진이나 좀 훑어보고 남은 활자의 양을 가늠하면서 '많이도 썼네' 하는 생각으로 다시 글목록으로 돌아간다. 2월 말부터 16개의 글을 매주 썼다. 처음엔 그럭저럭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가 개인적인 경험이나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는 인터넷 세상에 떠도는 정보와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지점에서 읽을 만한 흥미가 급격하게 떨어진 듯하다. 비로소 나의 밑천이 드러났고 이런 식으로는 시간 내어 이 글을 읽어 주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사람을 홀릴 정도로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한다는 것은 지극히 참인 명제다. 돈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동시에 문장과 어휘, 사고와 논리의 근육을 다부지게 해주는 것은 책 밖에 없다. 누구나 중요하다고 하고, 나조차도 이렇게 잘 아는데도 결국 안 읽는다. '유명해서', '디자인이 예뻐서',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등의 시답잖은 동기로 꾸역꾸역 쟁여둔 책 표지, 책등만 애처롭게 쳐다본 지난날의 내 모습을 반성한다. 지금까지의 글쓰기로부터 진일보를 위해서는 더 미루지 말고 어떤 분야라도 좋으니 천근만근의 무거운 책 표지를 가까스로 펼쳐내야 한다. 머리말을 읽고 목차도 잘 넘겨야 한다. 
 
  물론 잘 쓰기 위해선 무작정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꾸준히 어떻게든 쓰는 행위 자체를 통해 내가 만든 문장과 논리를 점검하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필력과 내공을 확장할 수도 있겠다. 일단 쓰고 보자는 여러 글쓰기 모임도 더러는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일상의 메모나 일기야 그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단계는 이제 지난 3개월과 함께 작별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블로그에서 앨범에 관한 소개를 할 때는 개요나 주제 없이 앨범을 먼저 정하는 것으로 과정을 시작했었다. 선정을 하고 나서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받아적는 '무작정 글쓰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뇌의 활용은 뒤쳐지고 손가락으로만 글을 썼다. 애초에 머리로 정리해 놓은 것이 없다 보니 작성 중에 수정을 거듭했고 고치는 과정에서 시간을 더 많이 잡아먹었다. 거기에 자료 조사까지 더하면 몇 시간은 훌쩍 넘겼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런 비효율에서 벗어나, 반대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를 먼저 제시하고 함께하기 좋은 앨범이나 곡을 선반에서 꺼내 곁들여 소개해보려고 한다. 연습이 부족해 글로써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내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조리 있게 펼쳐내는지 배우기 위해서는 역시 독서가 정답이라는 결론이다. '도파민 중독', '책 읽는 것은 실제로 무척 어려운 두뇌 활동이다.', '빅테크들의 인공지능 경쟁'이라는 담론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요즘, 언젠가 스마트했을지 모를 내 뇌를 점점 스마트해져가는 AI에게 빼앗기기 싫다면 더더욱 읽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독서의 중요성을 외친 오늘, 마음의 양식과 함께할 만한 앨범을 바이닐 목록에서 골라보았다.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램지 루이스(Ramsey Lewis)와 그의 트리오가 1968년에 발표한 「Maiden Voyage」를 곁들여보자. 책을 읽기에 공간이 너무 적막에 휩싸여 허전할 때, 앉은 자리 주위가 너무 북적여 이어폰을 꽂아야 할 때 이 앨범을 검색하길 권한다.  램지 루이스의 동료이자 이 앨범의 프로듀서인 찰스 스테프니(Charles Stepney)가 만든 곡들, 당시에 먼저 인기를 끌고 있던 허비 행콕, 비틀즈나 밥 딜런, 퀸시 존스 등의 곡들을 편곡하여 재구성한 소울/재즈 앨범이다. 1960년대 말의 미국 음악계에서 검증된 히트 곡들이, 램지가 빚어내는 어쿠스틱 건반의 투명한 선율과 그의 트리오의 연주를 만나 우리의 독서 환경을 노련하게 가꾸어 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흥을 돋우거나 나른하게 하지는 않을 트랙들로 채워진 빼어난 작품이다. 
 

귀여운 앨범 커버. 트리오 구성은 베이스에 클리브랜드 이튼, 드럼에 모리스 화이트. Earth, Wind & Fire의 그 모리스 화이트 맞다.

https://youtu.be/R9ErSy0wWu0

후반부 램지의 피아노 연주가 극락 파트인 'Only When I'm Dreaming'. 미니 리퍼튼이 이후 목소리를 더해 발표했다.

 
https://youtu.be/wVkzV6MT1Zs

허비 행콕의 대표곡을 능숙하게 해석한 램지 루이스.

상도덕을 무시한 커버 뒷면. 앨범 구입은 역시 모자이크.

  그래서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처음부터 무거운 비문학에 뛰어들었다가 여러 번 경험한 실패를 되풀이할까 싶어 우선 가벼운 마음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로 시작해보려 한다. 고등학교 때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갈 때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있던 책이라 신비함이 떨어져 손이 가지 않았던 그 두꺼운 책. 독해 속도가 빠르지도 않은 내가 펼쳐든지 얼마안가 벌써 1권의 25% 정도 읽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당황하는 요즘. 주인공인 아오마메가 일을 하러 가기 전 택시에서 들었던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도 찾아 들어보았다. 역시 스마트폰의 화면으로부터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활자로 관심의 방향키를 급히 돌리는 데엔 탄탄한 플롯을 가진 문학 작품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모은 바이닐들을 지난 몇 주간 꼼꼼히 살펴 소개한 것처럼, 무자비하게 사들인 책들에게 인테리어 소품 이상의 역할을 내 반드시 부여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