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 Ayers Ubiquity의 「Vibrations」로 수집을 위한 수집 반성하기

지금까지 바이닐을 200장 정도 모았지만 솔직히 말해 이만큼 수집을 했다고 해서 모든 앨범을 수 회 이상 정주행해본 것도 아니고 아직 제대로 듣지 않은 것도 많다. 어떤 앨범은 비닐로 된 shrink wrapping도 안 뜯은 새 상품이다.

 

그러다보니 지나가다가 우연히 내가 가지고 있던 앨범의 곡을 들었을 때 이게 누구 노래였는지, 혹은 제목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날 때가 많다. '하 이거 뭐였지... 아 그 사람 노랜데 제목이 기억 안 나네...' 하는 식이다. 심지어 내가 샀던 앨범이라는 것 조차 모를 때도 가끔 있다. 그래서 샤잠으로 음악 검색을 하고 나서야 '아니 나한테 있었던 앨범인데 이런 곡이 있네?' 하는 것이다. 누가 보면 '당연히 알게 되는 것 아니야?' 할 수 있겠지만 제목과 가수를 음악과 하나하나 매치하여 꿰고 있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이미 다른 영역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여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까닭에서 앨범을 샀음에도 그 수록곡과 아티스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또 어떤 까닭에서 구매한 앨범을 적게 듣게 되는 것일까? 제일 큰 문제는 사고 싶은 앨범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 발매하거나 참여한 앨범이 한 둘이 아니다. 그 앨범들이 음반 시장에 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특히 중고 시장에선 정말 홍수처럼 판매 목록이 업데이트된다. 나는 그중 극히 일부분 밖에 사지 못했는데도 200장을 모아버렸다. 이러다 보니 사는 속도가 듣는 속도를 자연스럽게 앞질러 버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내 공간'에 맞다고 생각되는 앨범을 발견하면 '햐.. 이건 사야 돼' 하다 보니 일단 먼저 구매를 해버렸다. 

 

수집한 앨범이 많을수록 다양한 트랙을 골고루 조합하여 다채롭고 풍성한 믹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여건상 아직 믹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좋은 점이 부각되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로그의 의미를 또 한 번 찾아보자면 앞서 언급한 수집을 위한 수집에 대한 반성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깊은 감상을 해보기 위한 나름의 도전이기도 하고! 앨범의 크레딧을 한줄한줄 꼼꼼히 읽어보고, 커버 아트를 멀리서 감상해보기도 하거나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고, 숨어있는 글과 인터뷰, 가사지, 라이너노트를 다 읽어보면서 밀도 높은 감상을 해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이 에이어스(Roy Ayers)의 앨범 중 하나인 Vibrations를 감상하는 내 나름의 과정을 적어보았다.

76년 polydor 일본반. 그의 눈빛 너무 그윽해서 부담스럽다.

뒷면. 동물이 등장하여 좋은 앨범일 것이란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크레딧이 자세하게 써진 편이어서 좋았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로이 에이어스는 70년대부터 80년대 재즈와 훵크, 소울 씬에서 활동한 비브라폰 주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건반 악기 연주와 작곡, 프로듀싱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진 인물이다. 적지 않은 그의 곡에서 직접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Roy Ayers Ubiquity>라는 밴드를 직접 이끌었으며 가장 유명한 곡으로 'Everybody Loves the Sunshine'을 꼽을 수 있다.

 

레코드샵에서 로이 에이어스의 앨범이 보이면 '일단 사는' 편이다.(앞서 언급한 이야기에 뒤이어 이 앨범을 소개하는 이유다.) 전체 디스코그래피에 비하면 적은 양이긴 하지만 어느덧 6장이 모였다. 숙고 없이 그의 앨범을 구매해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의 위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고.

 

처음으로 샀던 그의 앨범은 웰컴레코드가 압구정에 있을 때 거기서 건진 「Unreleased Recordings Vol.2」이고, 「Vibrations」는 현 위치인 해방촌으로 이사 온 후에 찾아가서 산 앨범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Searching'이 수록된 앨범으로 잘 알려져 있듯 Pete Rock&C.L. Smooth 등 수많은 힙합 프로듀서들의 사랑을 받은 곡과 앨범이다.

 

커버 사진과 앨범 크레딧을 통해 그가 사용한 비브라폰 모델명을 알 수 있었다. 바로 Deagan사(社)의 「aurora II」로 로이 에이어스 이전에 재즈 비브라포니스트 밀트 잭슨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대한 실로폰(요즘은 글로켄슈필이라고 하던데...)을 연상시킨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도 가장 뒷열에서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가져서 은은하게 곡의 부피를 한 층 더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메인 멜로디를 이끌어나가기도 하는 멋진 악기다. 거대한 실로폰이라고 생각하여 연주하기 쉬워 보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디서든 비브라폰 주자가 두 쌍의 말렛(연주용 채)으로 현란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진지하고 멋질 수가 없다. 

가운데 페달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 출처: Reverb.com

두 쌍의 말렛을 들고 있는 Roy Ayers의 모습. 큰 막대사탕 같아 조금 귀여워보이기도.

앨범에서 추천하고 싶은 곡은 모두라고 하고 싶지만, 그중에서 꼽자면 A면의 2, 4, 6번 곡 그리고 B면의 1, 3, 5번 곡이다. 모두 느린 템포의 곡으로 분위기와 맥락이 같은 궤를 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B면 1번 곡인 'Searching'을 제외하고 최고를 꼽자면 B면의 3번 곡 'Vibrations'. 가사는 'Good Vibrations...' 가 전부인데 정말 끝내주는 바이브로 3분을 꽉꽉 채워버린다. 

 

앨범을 전체 재생하고 커버를 뒤적이며 뒷면의 사진을 자세히 보니 동양인이 한 명 숨어있었다.

엎드린 로이 에이어스의 등 뒤로 보이는 아시아계의 얼굴.

동양인의 이름을 구별해내기란 정말 어렵지 않지.

식견이 부족한 탓에 아직까지는 이런 소울/훵크 밴드 단체 사진엔 환하게 웃고 있는 흑인들만 봐왔는데 그 틈바구니에 친숙한 피부색의 동양인이 끼어있는 게 적잖이 이질적이고 새로웠다. 크레딧을 보니 'Phillip Woo'라는 키보디스트였다. Woo씨 성이라면 한국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들떴는데 한참 찾다가 인터뷰 영상을 확인해 보니 입양된 중국계 미국인이었고, 일본에서 새로운 국적을 얻었다고 한다. 하긴 한국인이었다면 이미 잘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Phillip은 놀랍게도 로이 에이어스의 밴드말고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Maze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몰랐다. 마침 앨범이 있어서 찾아봤는데 정말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적혀있다. 심지어 커버 뒷면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있었네. 좋아한다면서 이런 것도 몰랐다. 당연히 다 흑인일 줄 알았지. 

아직 이거 밖에 없어서 다른 앨범도 더 구해야한다.

다소곳이 자리잡은 이름 Phillip.

 

나중에 내가 이 글을 다시 볼 때 기억했으면 좋겠어서 덧붙이자면, 이번 앨범의 제작에 함께한 Edwin Birdsong라는 사람이 있다. 로이 에이어스와 여러 앨범에서 합을 맞춘 인물인데 솔로로도 활동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Cola bottle baby라는 곡을 세상에 내놓은 것인데, 직접 재생해 보면 왜 내가 그를 언급했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앨범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감상 포인트가 숨어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찾아보는 과정이 계곡에서 돌덩이를 하나하나 들춰보며 다슬기를 찾아내는 것 같아서 참 즐거웠다. 시간이 너무 모자라. 알아보는 내내 앨범을 재생하고 있었는데 어째 곡에 대한 소개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추천 곡 외에도 빠른 템포의 수록곡들은 2020년대엔 다소 낯설 수 있어도 듣다 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곡들이니 편식하지 않기를 당부하며 이만 마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