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gs at the Speed of Sound」와 영화음악

  고등학생 때,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주변인과 유명인들 모두 포함)의 공통점으로는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것이 아닌 영화를 즐긴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영화를 여러 편 보는 것을 넘어 깊이 있는 감상문을 꾸준히 남기거나, 누군가가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다며 그에게 추천을 마침맞게 해 준다거나, 영화의 줄거리나 시놉시스를 구성지게 설명해서 듣는 사람이 안 보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다소 식었어도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줄기차게 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타고난 이야기꾼도 아니고 추천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무턱대고 이것저것 찾아봤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dvd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감상실에 들락날락해보기도 하고 입대 전후로 영화관에서 2년 동안 아르바이트도 했다. 

 

  영화와 음악은 서로 분리하기 어려운 사이이기에 음악을 좋아하던 내 입장에선 영화에 애정을 붙이기가 정말 쉬웠다. 영화를 볼 때 좋아하는 음악이 나와도 소름이 돋고, 나오는 음악이 너무 좋아도 그렇다. 내겐 감상 후 별점에 0.5~1점을 추가할 수 있는 요소이기까지 하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곡을 선택해서 편집해넣는 것 또한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감상할 때 중점을 둘 수 있는 요소들이 많지만, 이처럼 사용된 배경 음악을 놓고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몇 편 있다. 그중 「와일드」는 항상 손에 꼽히는 인생 영화들 중 하나다.

와일드(2014)

「와일드」는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가 미 대륙의 대자연 속에서 험난한 여정을 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리즈 위더스푼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대중에게 각인된 「금발이 너무해」 주인공의 이미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셰릴이 맞닥뜨리는 시련과 광활하고 경외감이 감도는 대자연이 교차되는 가운데 여러 배경 음악이 등장하여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장면에 감칠 맛을 더한다. 내겐 사이먼앤가펑클의 'el condor pasa', 윙스의 'Let 'Em In'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https://youtu.be/i6d3yVq1Xtw

사이먼앤 가펑클의 1970년 앨범. 훗날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다시 듣게 되어 그 장면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https://youtu.be/re61B8sKQWk

1976년 앨범. 이 노래를 별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나요 혹시..

   그중에서도 'Let 'Em In'은 오늘 가져온 앨범, 윙스의 「Wings at the Speed of Sound」의 첫 번째 트랙이다. 대단한 멜로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하지 않지만 덤덤한 연주와 폴 매카트니의 목소리가 영화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와일드」가 국내에 개봉했던 2015년부터 아직까지도 이따금씩 찾아 듣는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 「위아영(While we're young)」에서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데, 별로 인상 깊지 않아 딱 한 번만 본 영화에 쓰였다는 이 사실을 기억할 만큼 이 곡의 힘이 나에겐 대단했다.

 

  작년 홍대에서 열린 레코드페어에서 마침내 바이닐 앨범을 구할 수 있었다. 리빙사 부스에서 열심히 박스를 뒤적거리다가 커버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꺼내들어 곧바로 사장님께 가져가 계산했다. 나에게 특별한 곡이 든 앨범이니까 꼭 가지고 싶었는데 단돈 만원에 들일 수 있어 정말 행운이었다. 이전까진 'Let 'Em In'과 잘 알려진 'Silly Love Song'외엔 다른 수록곡들을 들어보지 않았었는데 집에서 전곡을 재생해 보니 전성기 윙스의 앨범답게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어떤 곡은 촌스럽게 들릴 수 있을 테지만 듣는 시점이 지금이니까 그런 것뿐이니 별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이전 다른 앨범들과는 다르게, 윙스의 모든 구성원들이 보컬로 적어도 한 곡 씩 참여했던 점이 재미있었다. 

앞면은 재미없는데

뒷면이 예술이다

  「와일드」가 내게 'let 'em in'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나는 여기에 또 다른 수록곡인 'warm and beautiful'을 남기고 싶다. 가장 마지막 차례에 재생되는 곡으로, 린다를 향한 폴의 사랑이 담긴 따뜻하고 아름다운 발라드다. 누군가는 존 레논이 'Imagine'을 남겼다면 폴에겐 이 'warm and beautiful'이 있다고 하던데, 납득이 갈 만큼 모두를 편안하고 사랑이 충만하게 만들 수 있는 곡이라 생각한다. 잠자리에서 오늘 하루를 마감하며 듣기에도 아주 좋다. 

https://youtu.be/IbRcKPqqDCc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영화와 다소 멀어지게 된 건 아무래도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들의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었는데, 이젠 OTT가 달려들어 아무리 달콤하게 유혹해도 시큰둥하다. 게다가 감상하는 태도도 위에 언급한 처음 때보다 수동적으로 바뀐 것 같아 씁쓸하다. 어떤 영화를 봐도 '재밌다'의 범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소감만 남길뿐이다. 사실 이에 대해 이전까진 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얼마 전 애인과 함께 한 영화를 보고 나서, 재밌었던 포인트들을 줄기차게 내놓았던 애인과 달리 영화에서 나온 노래가 들을만했다는 것 외에 별다른 감상을 공유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여 위기를 느끼고 말았다. 말라붙은 감성과 뇌에 다시 기름칠을 하기 위해선 창작이 상책이라고 하니 꾸준히 이곳에라도 글을 지어야겠다. 그러다 훗날 애인과 영화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화에서 'warm and beautiful'이 흘러나오는 기적이 내게 생긴다면 아무래도 훨씬 할 말이 많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