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커튼콜

과거 사진은 작게

 

고등학생 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학교 연극동아리에 들었다. 배우로도 스탭으로도 매년 한 두 번씩 연극에 참여했다. 부원들끼리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보니 몇몇은 오히려 같은 반 친구들보다 더 돈독해졌다. 졸업 이후에도 한 학년 위인 9기 멤버들과는 유독 더 친하게 지냈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고도 우리는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갔다. 마침 9기 선배 두 명이 그해 말에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놀아보자는 뜻으로 졸업생 공연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재밌겠는데? 

 

  목표 공연일자는 삼개월 뒤인 10월 중순. 그때부터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공연을 기획했다. 이왕 학교 바깥에서 해보는 연극이니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을 대관하자, 이제 학교 동아리실에서는 연습을 못하니까 외부 연습 장소를 따로 알아보자, 우리끼리는 손이 모자라니 올해 신입인 13기 애기들한테 부탁 좀 하자…. 극 선택, 캐스팅, 캐릭터 분석, 대본 리딩, 동선, 연출, 소품, 조명, 음향, 포스터 제작, 홍보, 관객 입장 방식까지 정해야 해서 회의는 끝도 없었지만 연극은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추어나갔다.

 

  군휴학 중인 두명을 제외하면 참여 멤버들은 대부분 대학생이었다. 나도 그랬다. 이게 뭐라고 여름 방학도 반납하며 연습했고 중간고사도 제쳐두고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0월이 되자 예정된 공연 소식을 페이스북으로 알렸다. 우리 동아리에 익숙했던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보통 좋아요를 누르고 반응을 보였는데 고맙게도 대학교 과 동기들까지도 관심보였다. 워낙 과활동을 잘 안 했던 터라 놀라우면서도 쑥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사실 나 이런 것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그중 몇몇이 일정을 맞추어 연극을 보러 가겠다고 해주었을 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공연 당일 관객 입장 한참 전부터 우리는 빠진 소품이 없나 체크하고, 꼬였던 동선을 살피며 오랜만에 찾아오는 무대 위의 긴장감을 즐겼다. 대본이 구멍나도록 밑줄을 그어도 도통 외워지지 않는 몇몇 대사 때문에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마지막 피드백을 나눈 뒤 다 같이 화이팅을 외쳤다. 무대 뒤와 이어진 어두운 분장실에 후다닥 들어가 숨죽이고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객석이 들어차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인공 형제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는데 막이 오른 후 수 분이 지나야 무대에 등장하게 되어있었다. 초조함 속에서 기다리다가 소품으로 만든 문을 열고 등장했다. 대사들이 이제 뇌를 거치지 않아도 상황에 맞게 알아서 입에서 내뿜어졌다. 프로 배우라면 무대 위에서 완전히 캐릭터에 빙의되었겠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얘네의 아버지다 라고 최면을 걸며 대사를 치는 와중에도 이따금 대학생 자아가 튀어나와 객석 쪽을 은근히 살폈다. 슬쩍 관객을 둘러보며 아는 얼굴이 없을까 훑었지만 어둠 속에선 누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객석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선 대놓고 빤히 바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잇 아무도 못 찾았네, 하면서 타이밍에 맞춰 다시 무대 뒤로 돌아갔다. 이후 몇 차례의 암전과 막 전환을 거치며 우리는 연습한 대로, 때로는 작은 실수에 놀라기도 하면서 준비한 것을 맛있게 선보였다. 기억나지 않는 마지막 대사를 누군가가 치곤 우하하 다같이 웃으며 마침내 커튼콜. 환하게 밝아진 무대에 차례차례 등장하며 손잡고 인사했다. 그제야 객석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동기들 네 명 정도가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딜 살펴봐도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없었다. 벌써 나갔나, 하며 입장을 담당했던 스탭들에게 물으니 준비된 객석에 비해 입장객이 많아 선착순 이후에 들어온 일부는 입장을 못했다고 전해 들었다. 박수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하며 누군가는 꽃을 주고받는 사이에 분장실에 있던 핸드폰을 보니 “ㅠㅠ”, “ㅋㅋㅋ뭐냐”, “못 들어간대.” 같은 동기들의 카톡이 주루룩 와있었다. 아쉬운 대로 그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곤 내 연극이 끝나길 기다린다고 했다. 내가 입장을 챙겨주지 못했음에도 원망하거나 서운하다는 투가 아닌 메시지여서 더욱 미안해졌다. 서둘러 짐을 챙겨 분장도 제대로 못 지우고 부랴부랴 근처 카페로 달려갔다. 보지도 않고 재밌었다고 너스레 떨었던 친구들 덕에 분위기는 좋았지만 너무나 불편했던 마음.

 

  하필 그날 공연은 3회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대사 실수도 없었고, 음향과 조명 타이밍도 척척 맞았다. 공연으로서는 흠잡을 게 없었는데 객석에 내 관객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연극동아리 친구들과는 아직까지도 그때를 떠올린다. 

“야 그때 어떻게 했냐, 스무살이면 완전 애긴데.”

“다들 돈도 없었을 땐데 미쳤었던 것 같아.” 

“그러고 나서 제대하면 한 번쯤은 더 할 줄 알았는데 안 됐네~.”

다들 웃으며 떠올리지만 아직까지 나 혼자 그 씁쓸한 뒷맛을 즐기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