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스 비욘드 더 논두렁스

 
그날은 2015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긴팔에 반바지 차림의 활동복을 입을 수 있는 그런 날. 한가로운 주말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 입대 동기인 제제에게 저녁 식사 전에 산보를 제안했다. 제제는 익숙한 듯 수락하며 관물대에서 숟가락을 챙겼다. 식단표를 확인하곤 생활관 밖으로 나섰다. 우리는 전역을 보름 앞둔 말년 병장으로 당직 근무에서도 막 제외되었던 터라 부담 없이 부대에서의 남은 날들을 즐기고 있었다. 사지방, PX가 더이상 특별해지지 않은 무렵부터는 사단 내에 발을 들여보지 않았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년을 보냈다.

 

  우리 사단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철책 테두리 안에는 열 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부대가 넓게 퍼져 있었다. 각 부대는 건물을 하나씩 사용했다. 한 치의 변형도 허용하지 않는, 반듯한 벽돌 모양의 생김새라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꽝이었지만 그것이 군대 아닌가. 대신 그 각진 느낌 덕에 매우 견고하고 단호해 보였다. 건물들로 이어진 길을 따라다니다 보면 온갖 수목들이 병사들에 의해 꾸준히 관리되고 있었다. 호랑이 조각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공원과 쉼터, 간부 숙소와 종교 시설도 곳곳에 있었다. 통일된 군대식 양식으로 잘 디자인된 단지였다 보니 작전이 치열하게 논의되는 부대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학 캠퍼스나 연구 단지처럼 친근해 보이기도 했다. 사단 바로 뒤에는 치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철책 밖으로는 드넓은 논밭이 관개수로, 비닐하우스와 함께 펼쳐져 있었다. 더 멀리 내다보면 그 경계 바깥에 허름한 민가와 고속도로가 펼쳐져있어 영내에서 바라보는 자연경관이 제법 멋졌다.

 

  5분 남짓한 거리의 정비근무대 뒷편에 가면 전세 내고 앉아서 그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인적도 드문 편이라 일병 때부터 근처 쓰레기장에 생활관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다니다가 산책 스팟으로 일찍이 점찍어뒀었다. 제제와 함께 여러 산보 루트 중 그쪽으로 걸어갔다. 길을 따라 양쪽에 키가 아주 큰 잣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가끔씩 도로에 거대한 잣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에 밟혀 껍질이 으스러져있으면 그 자리에 청설모가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는 이 길 걸을 날도 얼마 안 남았네, 많이 걸어둬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논두렁이 시야에 천천히 들어왔다. 내가 먼저 칠이 다 벗겨진 낡은 나무 벤치에 털썩 앉았다. 멀리 보이는 고속도로에는 변함없이 손톱만 한 차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은 떨어지는 해를 따라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앉아있던 벤치와 그 아래에 펼쳐진 논 사이엔 녹슨 철책과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시커먼 울타리는 영내 어딜 가나 보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기나긴 행렬이 육중한 몸을 가진 교도관들처럼 보여 불쑥불쑥 올라오는 탈출 욕구가 무력하게 꺾이곤 했는데 다시보니 새삼 초라한 종잇장 같았다. 군생활을 괴롭게 만들었던 작업, 근무, 훈련 따위의 것들도 다 무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등병 땐 수확을 마쳐 벌거벗은 논을 앞으로 두 번은 봐야 한다며 한탄하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팍스 코리아나나 꿈도 꿨던 우리였지만 이젠 바라는 것도 딱히 없었다. 전역은 가만히 있어도 손에 잡힐 거리까지 다가왔고 곧 말년으로서 긴 휴가도 떠날 것이다. 지난 600여 일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왔기 때문에 철책 너머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소상히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오리무중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역 전 흔히들 겪는 말년 블루스 인가, 나는 갸웃하며 오늘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몰래 반입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