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알바가 끝난 이후였다. 개구리 군복을 입고 군생활을 했던 형들이 피곤하지도 않은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흥분해서 서로 큰 소리를 냈을 뿐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주제는 다림질. 휴가 때 입을 A급 전투복 상의의 등판 주름을 다림질로 몇 줄 잡는지, 어떤 스킬로 각을 생생하게 살릴 수 있을지 같은, 당시 미필자였던 내게 멀지만 유용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각자 복무한 부대별로 상세정보가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어느새 나도 옆에 슬쩍 앉아 홀린듯이 그 격렬한 전투를 관전하며 뽑아먹을 내용을 머리 속에 새겼다. 번외편으로 ‘전투화에 광내는 온갖 방법‘따위가 있었지만 군인들끼리만 알아보게 되는 신비로운 암호같은 다림질 스킬 쪽에 어처구니없게도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각이 생명이구나. 신병휴가 전 외출복 다림질은 맞선임이 해주는 거구나. 운운

얼마 안가 입대한 나는 디지털 전투복(그때만해도 신형이었던)을 보급받았다. 신형 전투복은 다림질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자대 배치 이후였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애초에 신형 전투복에는 각이 필요 없어서 그런지 생활관에서는 다리미를 구경조차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림질은 인생에서 좀 더 멀어졌다. 별로 아쉽진 않았다.

그러다 난생 처음으로 다리미의 전원 플러그를 콘센트에 연결해본 것이 바로 얼마 전 일이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어야하는 행사를 앞두었는데 전날 확인하니 셔츠의 구김이 예상보다 심했다. 공연히 주름을 만지작거리다 의식이 자연스럽게 다리미를 떠올렸다. 다리 부분을 조절하여 다림판을 허리 정도로 높이고 다리미의 전원을 켰다. 스팀을 쏴주고 싶어서 물구멍의 뚜껑을 열어 쫄쫄쫄 물도 채워주었다. 구멍 옆으로 물줄기가 샐까봐 주의했다. 효능은 모른다. 다들 다리미를 밀면서 스팀도 한 번 씩 촤아 촤아 쏘니까 괜히 한 번 따라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쫙 펴야되겠지?’하며 셔츠를 다림판 위에 가지런히 얹어놓았다. 적당한 온도인지는 모르지만 예열되어 충분히 달아오른 다리미로 셔츠 위로 조심스럽게 직선을 그어보았다. 변화가 크지 않은 걸 보니 힘을 너무 안 준 듯하다.

‘잘 모르지만 지금 스팀을 쏴볼까?’하며 스팀 버튼을 꾸욱 눌렀다. 다리미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뿜어져나왔다. 옆에서 쉬고 있던 강아지가 놀라 후다닥 도망갔다. 더운 김으로 축축해진 셔츠 위에 다시 한 번 다리미로 직선을 그으니 미세한 구김이 활짝 펴졌다.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힘은 줘야되나보다.’하며 셔츠 밑단의 테두리를 따라 다리미를 지그시 누르며 곡선을 그었다. 알맞게 주름이 펴지니 은근한 성취감이 들었다. 모든 것은 나의 컨트롤에 달려있다. 만두피처럼 평평해진 셔츠를 손바닥으로 슥 문질러보니 아직 남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주름질세라 조심하면서 다음 면으로 이동했다. 조금씩 능숙해지는 것 같다가도 방심하면 다리미에 옷감이 밀려 잔주름이 자글자글 생겼다.

‘잘 모르지만 이번 만큼은 잘못 그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하며 셔츠의 카라를 매만졌다. 입었을 때 가장 눈이 가는 곳이어서인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셔츠에서 가장 곡률이 큰 부분이어서 예측이 어려웠다. 원하는 모양으로 카라를 접고 귀퉁이를 손 끝으로 고정한 뒤에 접힌 선을 따라 다리미의 앞부분을 주욱 미끄러트렸다. 과정이 순조롭진 않았지만 깃이 빳빳해지고 의도한 선에 맞추어 칼같이 접힌 카라를 보니 그 옛날 형들의 왈가왈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리미가 방추 모양의 생김새를 하고 있는 것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탁월한 디자인이다. 앞부분의 좁은 각으로는 단추 사이 주름과 카라 깃을 섬세하게 펼 수 있었고 옆면의 넓은 각으로는 옷에 있는 곡선 부분에 맞추어 기차가 철로를 미끄러지듯 다림질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다림판도 그렇게 생긴 이유가 있었다. 뾰족한 부분에 맞추어 옷의 방향을 조정하면 어려운 작업을 할 때 제법 보조가 되었다.

서툴고 미숙해서 셔츠가 다림질을 한 옷처럼 보이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렸다. 효율이 좋지 않았지만 익숙해지면 해결될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내 옷가지를 면밀하게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그날 하루 내 용모를 책임지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도 라면 국물이 튈 때나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겨 해당 부위를 슥 들여다본 게 전부였던 듯하다. 하루키가 다림질을 옷과의 대화라고 표현한 것이 참 공감이 되었다. 모든 부분을 구석구석 손끝으로 쓸어보고 짜임이 보일 정도로 자세히 살폈다. 그렇게 옷과 나눈 대담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다음날 셔츠를 입을 때 가벼운 애착이 스몄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조금 더 소중하고 점잖게 옷을 대할 수 있었다. 앞으로 적어도 자기 옷은 자기가 다려야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후 두 어번 더해본 다림질. 치열한 긴장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 자리엔 놀랍게도 마음의 평화가 깃들었다. 다리미로 획을 그을 때마다 펴지는 주름을 눈으로 따라가니 시끄러운 내면이 잠잠해졌다. 안전사고 우려도 있으니 핸드폰과도 잠시 안녕이다. 이제부터 무언가가 날 갉아먹을 때 마음 수행은 다림질로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