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둑 후두둑 후두두둑 - 비 맞으러 나가는 날에 대한 소고

https://youtu.be/gkpgWqySX-0?si=xItcbB0Cz3PszeM_

Cal Tjader - Huracan

 

 

후둑 후두둑 후두두둑

 

  짙푸른 수박을 쩍-하고 갈라 입 주변이 흥건해지도록 달큰한 과육을 먹어치우기. 여름에 빠지면 섭섭한 일이다. 냉면은 또 어떤가. 육수와 메밀 함량이 어쩌고 출신 이북 지역이 저쩌고를 떠나 내 입맛엔 싸구려 고깃집 후식 냉면부터 우래옥 물냉면까지 무엇이든 달갑다. 바다 수영과 서핑도 여름이 선사하는 즐거움 중 하나. 안락한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는 것은 언제든 설레는 일이고, 뙤약볕 아래여도 바다가 오늘 하루의 무대였다면 방구석까지 딸려온 모래알갱이들을 쓸어내는 일도 고깝지만은 않다.

 

  반면 여름이라 꼭 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마와 태풍이었다. 약속 당일 비가 쏟아진다면 상대방에게 대자연의 강림을 핑계대며 만남을 미루자고 호소했다. 그 길로 다시 거실 대자리에 드러누워 배달시킨 전에 막걸리나 한 잔 걸치고 싶었다. 냉장고에 막걸리가 없어 동네 슈퍼에 결국 나가야만 했고, 오늘만큼은 성가신 비에 젖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폭우 앞에 무용했던 우산만큼 초라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거친 비 예보에도 마냥 한숨부터 나오지만은 않는다. 온몸으로 비맞는 재미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와- 비 잘 온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대차게 쏟아지는 장대비일수록 좋다. 성북천 출입과 통행을 통제할 만큼 오래 오면 더 좋다. 발단은 2년 전 애인의 제안이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여느 때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애인은 느닷없이 비 맞지 않겠냐고 했다. 일정이 없었던 날이었기에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 ‘비 맞을래?’라는 애인의 말이 꼴값 떠는 어른 가면을 벗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처럼 들렸다. 그러곤 우리는 슬리퍼를 끌며 자유로운 양손을 가지고 워터 파크가 없던 시절 성북초 3학년처럼 신나게 빗속을 누볐다.

 

  처음엔 우산 없이 비맞는 게 어색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 있다. 동네 할머니들의 염려 섞인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쭈뼛거리며 씌워주는 우산을 멋쩍게 거절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져 잡념에서 멀어진다면 비로소 옷 위로, 피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지하고 있던 촉각에 몰두하게 된다. 참 시원하다. 딱히 억압받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해방감을 느낄까? 고체든 액체든 후두둑 쏟아지는 미세한 알갱이들로 이렇게 온몸을 마사지할 일이 평소에도 있던가? 왜 그동안 작은 비에도 우산을 쓰도록 학습이 되었을까? 그때부터 호우 경보는 귀한 이벤트가  되었다.

 

  끝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사은품처럼 부가적인 이상야릇한 묘미도 맛볼 수 있다. 쫄딱 젖은 몸을 뜨끈한 온수로 샤워하기. 새삼 우리집 귀뚜라미 보일러에게 감사해진다. 평소에 하는 목욕과 다를바 없어도 훨씬 온몸이 개운하다. 아무것도 배설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쥐어짜 내 배설한 듯한 카타르시스와 5cm 정도 지상에서 몸이 떠 욕실을 부유하는 두리둥실한 구름같은 느낌이 이어진다. 녹을 듯한 몸을 애써 지탱하다가 머리까지 말리고 나와서 쓰러지듯 자는 낮잠의 당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 속에서도 극중인물이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장면은 자주 등장한다. 감독은 비를 활용하여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 온몸이 비에 서서히 젖어가거나 흠뻑 젖은 채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관람하는 우리까지도 어떤 필터를 눈에 장착하고 바라보는 것과 같이 눈앞의 시퀀스가 주는 극대화된 감정과 메시지에 감화된다. 이것을 시청각이 아닌 후각과 촉각으로 참여하여 직접 받아들여보자. 폭우가 우리에게 건네는 감상에는 제법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았다.

 

  그러니 남은 폭우와 장마, 그리고 아직 한반도에 방문하지 않은 태풍이 온다면 허투루 보내지 말자. 젖어도 상관없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치고 한번쯤은 빗속에 나를 내던져 보면 어떨까. 힘든 집안 청소나 거친 홈트레이닝을 한 이후라면 더욱 마침맞다. 유행처럼 번지는, 러너들의 특권인 우중런은 또 어떤가(사실 우중런은 어딘가 기름지고 느끼하게 들려, 나는 이를 ‘비맞뛰’라고 말하고 싶다). 몸에 흙, 먼지와 땀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 더 복잡하게 뒤섞여 있을수록 비 맞는 효과는 수직 상승한다. 현관 밖으로 나와 낱낱의 시원한 빗방울을 맞는 그 순간만큼은 이곳이 성북동 어느 허름한 골목일지라도 앤디 듀프레인이 마침내 도달한 쇼생크 너머의 피안(彼岸)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이제 다음 해부터는 맞기 좋은 비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지 모른다. 여름이어야만 한다. 늦봄, 초가을엔 아무리 따뜻해도 체온이 금방 떨어져 감기를 수반할 것이다. 이슬비나 가랑비, 안개비는 어딘지 모르게 시시할 것이다. 온 세상이 장마와 태풍으로 떠들썩해질 무렵 각자의 몸에 잠들어 있던 친수성 DNA를 깨워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화장실로 가는 길에 수건을 미리 깔아놓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