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권을 읽고.

※  「1Q84」 3권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마침내 3권까지 다 읽었다. 막힘없이 잘 읽히는 베스트셀러 소설이긴 해도 좀처럼 가까이하기 힘든 두꺼운 책 3권 전체를 꼼꼼히 읽은 나를 우선 칭찬하고 싶다. 전체 분량으로만 보면 대장정이었지만 사실 체감하기로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다녀온 산책 정도로 가벼운 여정이었다. 처음 길을 나서면서는 준비가 필요할 수 있어도 일단 문을 열고 나오니 하루키의 문장들은 휴일의 좋은 날씨처럼 보행자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주기도 하고 귀가가 아쉬워지게도 했다.
 
  3권은 덴고와 아오마메에, 2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우시카와의 에피소드까지 더해져 인물 세 명의 에피소드가 번갈아가며 전개되었다. 장(章) 수도 총 서른 한 개로 이전 권들보다(24장씩 구성) 훨씬 늘어났다. 처음 목차를 훑고선 우시카와가 느닷없이 왜 다시 등장했을까, 하면서 의아했다. 그저 덴고의 뒤를 밟다가 실패하여 자연스럽게 작중에서 퇴장하는 인물일 줄 알았다. 하지만 플롯의 중심부로 다시 돌아온 그는 자칫 맥락에 생길 수 있을 빈틈을 사설 탐정이라는 역할로 알차게 메꾸고 긴장감도 더해주는 장치로서 제격이었다. 우시카와가 아니라 다른 등장 인물의 시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멋지게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1권에서 덴고는 후카에리가 투고한 소설을 대필한 이후로부터 그가 묘사한 세계가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뒤로 하고 3권에 접어들며 이제 그는 '고양이 마을'이라는 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욕으로 자신만의 소설을 직접 집필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원인 모를 타의로 인해 '1Q84년도'라는 혼란스러운 세계에 내던져진 아오마메 역시 앞으로는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이 긴 이야기는 결국 독자들에게 가슴이 편안해지는 결말을 선사한다. 덴고가 앞으로 써내려갈 소중한 그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이런저런 의문과 회수되지 않은 떡밥들이 남았지만, '설명을 안 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저 주어진 결말로 충분히 행복해하려 한다.
 
우시카와에 대하여

후쿠스케 인형. 다마루가 우시카와를 보고 연상했던 것

  자칫 루즈해질 수 있었던 3권에서 몰입에 도움을 준 인물은 역시 우시카와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우시카와가 주요 인물로서 독자 앞에 나타난 것이 소설의 재미와 깊이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독자는 이전과 달리 3권부터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바라보는 제 3의 인물이 되어 그들 각자의 과거와 서로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시카와는 첫 등장부터 그의 마지막까지 '못생기고 특이한 외모'에 관한 수식어만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하루키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비참하게 묘사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냐고. 그런데 참고로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우시카와의 에피소드에서 그의 과거 이야기가 나올 때 나 역시도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은 너무 잔인하고, 다른 주요한 흐름에 신경이 쏠려있다보니 조금은 소홀하게 그 부분을 읽었던 것 같다. 성가셨다고 할까. '지금 이 중요한 흐름에 이 사람의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같은 식으로. 물론 무심코 그러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이것조차 작가의 의도였다면, 하루키 상...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이 비운의 외모를 가진 인물의 눈물나게 쓰라린 과거사가 정말 의미없었냐, 하면 전혀 그렇지는 않다. 그의 과거 일화가 한 겹 한 겹 더 쌓일수록, 뒷다리가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노루의 젖어가는 눈망울을 지나치듯 왠지 더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두터워지는 동정심과 깊어진 감정의 이입이 우시카와의 마지막을 가슴이 미어지지 않고는 못 보게 했다(미안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시카와에게 두 개의 달이 보이게 된 자초지종은 당최 어떻게 될까. 추측컨대 아오마메가 고속도로의 좁은 비상 통로를 통과한 것처럼, 후카에리의 시선이 좁다란 망원 렌즈를 뚫고 들어와 우시카와에게 닿은 순간부터 그가 이 '1Q84'년의 '고양이마을'로 초대된 듯하다. 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인물이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돌연 그를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린 바로 그 NHK 수금원이다. NHK 수금원은 이 이상한 세계의 내부에 들어온 인물들에게만 인식이 되는 특별한 존재다. 즉 '리틀 피플'이 활동하는 이 세계에서, 각자의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야 했던 후카에리와 아오마메만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그의 목소리와 집요한 노크만 인식할 수 있었듯이 우시카와에게도 수금원이 찾아온 것이다. 이 시점부터 두 개의 달이 그에게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수금원의 실체는 어느 누구에게도 소개되지도 않았다. 다만 이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덴고의 아버지와 함께 사라졌다고(즉,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다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버리면서 그 수금원의 정체와 그토록 집요하게 등장 인물들의 문을 두드린 이유는 알 수 없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아마 덴고의 아버지에게는 그 자신만의 '고양이마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선구'는 조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목소리를 듣는 자'를 어떻게든 찾아야 했지만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덴고와 아오마메는 이미 떠나버렸다. 하지만 우시카와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시카와의 입에서 별안간 쏟아져 나온 '리틀 피플'이 새로운 '공기번데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므로 아마도 이쪽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환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서로서로 해피엔딩이 된 셈이다.
 
  이와 별개로 상황이 점점 우시카와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쓸쓸하고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돌면서 아무래도 그에게 비극이 도래하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어찌저찌 결국 아오마메의 집에 침입한 우시카와가, 이 세계를 떠나버린 그녀의 소식을 듣곤 '선구' 역시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방에 숨겨진 권총의 총구를 자신의 입 안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결말을 맞이하진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다. 지나친 상상이었고 어느 쪽이든 슬픈 마지막이지만 차라리 이 쪽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장면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길고 긴 서사 끝에 이루어진 두 주인공의 '재회'겠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독자들이 몸을 실은 열차가 향했던 바로 그곳. 재회 이전에 우시카와가 덴고를 감시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선고'의 스킨헤드가 부하들에게 출동을 지시했을 때 '8시 라디오'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깊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 이제 정말 끝이구나, 둘의 만남이 더이상 외부의 세력에게 방해받을 일은 없겠구나-' 하며 안심할 수 있었다.
 
  또한 맨션에 은거하면서 아오마메가 스페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덴고를 바로 남미로 데려가려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든 생각인데 너무 그렇게 떡밥을 정직하게 회수하는 것도 그리 멋있어 보이진 않았겠다. 처음 함께 두 개의 달이 떠있는 것을 확인한 후,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향하는 것을 알곤 '아, 그 공사장의 출구로 다시 가겠구나, 엉거주춤 기어서 좁은 입구를 통과하고, 이젠 차가워졌을 사다리를 오르려 하겠구나.' 하며 완벽한 수미상관에 나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시카와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을 때... 이 부분에 대해선 긴말하지 않겠다. 너무 쓰다.
 
빛나는 조연 
 
  다마루는 끝까지 유능하고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일을 해냈고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매개역할을 해냈다. 이런 인물은 작중에서 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소설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캐릭터일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부산 출신의 한국인이자 게이라는 정보만 주어진 미스터리에 휩싸인 캐릭터지만 1Q84를 읽는 내내 '그래도 다마루가 있으니까...' 하면서 왠지 기댈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나름 고맙기도 했다.
 
남겨진 의문
 
  결국 덴고의 출생에 관한 사실과 '상실'되어버린 유부녀 걸프렌드 등 추가적인 의문은 남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알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다시 1권으로 돌아가서
 
  대낮에 정체된 고속도로 위를 기어가던 택시에서 내리려는 아오마메에게, 택시기사가 남겼던 의미심장한 말이 무엇이었지?

"모든 일이 겉보기와는 다릅니다. 그런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일상 풍경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묘하다. 「1Q84」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로 들린다. 이 택시기사는 작가가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투영한 인물일까. 
 
  그렇다면 후카에리는 왜 맨 처음에 '공기 번데기'의 원고를 고마쓰가 몸담고 있던 출판사에 투고했을까. 지난 날, 열 살의 덴고가 아오마메에게 베푼 작은 친절은 훗날 아오마메로 하여금 덴고를 강하게 그리워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덴고의 손을 잡음으로써 전해진 아오마메의 마음은 그 반대로 작용했다. 그렇게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설명할 수 없는 논리로 우주를 새롭게 작용하게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후카에리라는 존재는 아오마메의 덴고에게 '가 닿기' 위한 진심이 아니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깊은 몰입을 긴 시간에 걸쳐 바쳤던 소설이었다. 이런 식의 강력한 문학적 체험은 아무래도 쉽게 잊기 힘들겠지. 「1Q84」 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왠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사람들과 이 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3권까지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여운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다. 두 주인공이 '신포니에타'에 대해 서로 신나게 떠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이만 감상을 마친다.
 
…
다 읽고 나서야 안 사실. 세 권의 표지가 다 다르네. 권마다 다른 인물의 실루엣이 그려져있었다. 아오마메 - 덴고 - 우시카와 순. 얼마나 정신없이 펼쳐 읽었으면 ! 

우시카와의 유일한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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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루의 태그호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