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권을 읽고.

※「1Q84」 2권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뒷 내용이 궁금해 서둘러 읽어내려는 조급한 마음과 한 자 한 자 더 꼼꼼히 눌러 담으려는 마음 사이의 엎치락뒤치락 싸움이었다. 어질어질하다. 600쪽짜리 책을 채 이틀이 되기도 전에 다 읽어본 적이 살면서 있었을까? 시간 많고 책 좋아했던 군인 시절에도 이렇게는 안 읽었던 것 같다. 워낙 흥미진진한 내용의 연속이라 어떤 장에서는 글자들을 쫓는 눈을 오로지 지금 읽는 부분에 집중하도록 초점을 의식적으로 고정하는 일을 정말 치열하게 했다. 시야를 가능한 한 좁게 유지해야 했다. 같은 장 다음 문단에 왠지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결정적인 장면이 나올 것이 예상될 때 아직 지금 읽을 차례인 문단을 건너뛰고 싶은 마음을 달래주느라 안간힘을 썼다.

  2권도 전편과 마찬가지로 두 주인공의 에피소드가 한 장(章) 한 장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1권을 읽을 땐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에피소드가 교차되는 구성이 낯설기도 했고 지금 내가 이걸 재밌게 읽고 있는 것인지, 여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 때문에 읽는 동안 소설을 이루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더딘 작업이었다. 반면 2권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파고들며 읽었다. 두 주인공과도 얼추 친해졌고 인물들이 가진 목표도 그/그녀와 똑같이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사이에서 피어나는 애절함과 심장이 두근거리는 서스펜스까지 더해졌으니 결국 이런 기상천외한 속도로 주파했다. 읽는 내내 1권에서처럼 덴고와 아오마메가 서로에게 어떻게 '가 닿을'지 너무 궁금했다.
 
이번에도 1권과 마찬가지로 요약을 해봤다. 1권 때만 해도 내심 요약이 오두방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2권 째에는 이전에 하던 걸 안 하자니 또 아쉬워서 이어나가게 되었다. 관성에 이끌려 쓰다 보니 나중에 스토리가 심화되는 지점에선 다음 장으로 한시라도 빨리 넘어가고 싶어서 요약하는 작업을 건너뛰고 싶을 때도 있었다. 꾹 참고 다 해냈지만.
 
사실 지금은 벌써 3권을 돌파하여 13장 정도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만약 이 요약문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이야기 가 조금 더 진행됐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시 2권의 감상문을 쓰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을 달래 가며 쓴 요약내용을 다시 훑어보니 2권과 3권 간의 구분이 다시 명확해져서 3권의 내용을 잠시나마 잊고 비교적 차분하게 쓸 수 있었다. 앞으로도 「1Q84」가 생각나면 다시 돌아와서 직접 작성한 요약 내용을 읽으며 되새김질해보기 좋겠다. 요약은 산 전체라기보다는 능선과도 같아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아웃라인을 잡는데 탁월했다.
 

2권에선 어떤 점이 재미있었을까

1.
1권에서 '적확하다'가 유달리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었다면 2권은 '가 닿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국어사전에 '가닿다'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가 닿다'만 여러 차례 등장하였다. '가닿다'는 '시선이 가닿다', '눈길이 가닿다'와 같은 조금은 관념적인 개념에 적용되는 표현인데 '가 닿다'는 실체가 있는 두 대상이 물리적인 접촉에까지 이르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 번역 과정에서 고민거리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덴고와 아오마메를 생각하면 번역 과정에서 '가닿다'보다는 '가 닿다'라는 표현을 택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한다. 
 
2.
2000년대에 쓰이긴 했지만 84년도 배경의 소설인데도 LGBT, 비건, 페미니즘 등에 관련된 이야기가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거론된다.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2010년대부터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다고 개인적으로는 느꼈는데 일본에서는 이미 저 시대 때부터 충분히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3.
레코드와 레코드를 재생하는 것에 대한 묘사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턴테이블을 들여놓는 시대였을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일본의 경제 거품이 꺼지기 직전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오마메가 바이닐로 출시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기도 하고 덴고와 유부녀 걸프렌드가 루이 암스트롱의 음반을 재생해보기도 했다. '분당 33회전', '바늘을 올리다' 같은 표현이 나오자 취미가 레코드인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웠고 읽기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다. 
 
4.
종이 신문을 읽고, 레코드와 라디오 정시뉴스를 들으며 때론 호출기(삐삐)를 사용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84년의 아련한 시대 배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본은 내가 살아본 곳도 아니고 84년 역시 태어나기도 전인데 시티팝이라고 일컬어지는 노래들을 들을 때 다들 말하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않은 시공간에 대해 향수와 비슷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2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마루가 호출기를 통해 아오마메를 불러낸 순간부터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와 직접 만나게 되는 장면까지. 그들의 조우 이전에 스킨헤드, 포니테일로 불리는 보디가드들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긴 채로 평범하면서도 실력 좋은 근육 스트레칭 지도사로 보여야 했다. 그 에피소드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계속해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그야말로 떨리고 쫄렸다. 알려진 사실만으로 미루어 볼 때 반드시 처단되어야 하는 '선구'의 리더지만 오히려 죽음을 갈구하게 된 이유를 듣자 아오마메만큼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멍해졌다. 아이스픽을 든 손으로 다음 동작을 취해야 하나? 멈춰야 하나? 누구여도 틀림없이 망설였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평생을 아껴왔던 사람의 이름까지 듣고 난 이후라면.  

  이전까지는 장(章)을 거듭하면서 두 주인공이 같은 시간대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다 21장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긴 흐름 속의 한 지점에서, 공원의 미끄럼틀을 사이에 두고 둘의 공간까지 맞닿는 것을 목격했을 때 정말 벅찼다. 비록 한쪽만 상대방을 확인하는 것에 그쳤지만 거기서 주는 아련함은 정말 아득했다. 그래 이렇게 쉽게 만났으면 3권이 안 나왔겠지. 존재자체가 스포인 3권. 그러고 보면 출간 당시엔 너무 두꺼운 데다가 세 권짜리라서 영 서점에서도 손이 안 갔었는데 우여곡절의 서사를 주인공들과 온몸으로 겪다 보니 이젠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써주어서 하루키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13장처럼 '선구'의 리더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19장에서 '공기 번데기'의 전체 줄거리가 나열될 때 '리틀 피플'이나 '도터-마더', '퍼시버-리시버'같은 작중 설정이 나오는 부분에선 다소 이해가 어려웠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속도감 있는 전개에 차분히 숨 돌릴 틈을 주는 하루키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둘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오면서, 현실 세계에선 누군가를 이토록 가깝게 아는 게 예사는 아니다 보니 어떤 경우엔 나와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덴고가 '이 페이스로 간다면 남들 비슷하게나마 성장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까.'라고 했던 게 와닿아서 적어두었다. 이 문장으로 나나 덴고가 멋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이따금씩 머릿속에 잠깐 머물다 가는 생각을 활자로 마주하여 오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2권까지 읽어오면서, 전체 흐름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일화들이 많다는 것이 의문이라면 의문이다. 쥐나 고양이에 관한 이야깃거리들,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나 책의 한 장면에 대한 설명, 조연급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한 과거 회상이 그렇다. 하지만 그냥 던져지는 떡밥이 아닐 터. 다들 무엇이든 상징하는 바가 있으니 사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3권에서 모든 떡밥이 회수되길 바란다. 이야기는 어느새 대망의 완결로 향하고 있다.
 

3장에서 등장한 아오마메의 권총. 컴팩트함이 느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RfbmjUQOFxs 

덴고와 후카에리, 지상 최강의 듀오

'선구'의 리더의 죽음 이후 호텔에 드나 들었던 차들.

그 밖에 2권에서 등장한 아름다운 자동차들.

화려한 패배자들의 포스터와 아오마메가 닮고자했던 극중 페이 더너웨이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