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2013년 출간

 


순례
 
  '순례'라는 말은 종교가 없는 나에겐 아주 낯설고 지구 반대편에서나 일어날 법한 예사롭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순례'가 하나의 바구니라면 거기엔 수양, 숭고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있을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순례를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취침 전 엎드려서 함께할 수 있었던 건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이자 큰 행운이었다. 물론 주인공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소설에나 해당될 수도 있겠으나, 유난히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하루키의 플롯에 의해 주인공의 입장에 유난히도 깊이 끌어당겨졌던 것 같다.
 
  순례는 곧 여정이다. 작가의 설정대로 여정은 펼쳐진다. 같은 여정일지라도 시간 순으로 옆에서 관찰하듯 단조롭게 서술하기보다는, 온전히 읽는 이의 체험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위해서 하루키는 절정에 이르기까지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며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을 기꺼이 할애했다. 그것이 꽤 유효했다고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제목

  유난히도 길이가 긴 제목을 둘로 나눠보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다자키 쓰쿠루는 쉽게 예측할 수 있듯,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렇지만 색채가 없다는 꾸밈말은 어째서인지 작가 입장에서 내 소설의 주인공에게 붙이기엔 조금 망설여진다. 전통적인 주연의 느낌도 아니고 그렇다고 슈퍼빌런의 이미지도 아닌 어느 쪽으로 보나 그다지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형용어다. 다행히 하루키는 첫 장에서 오해의 씨앗을 거두기로 한다. 쓰쿠루는 고등학교 시절 네 명의 친구와 그룹을 이루어 함께 지냈다. 이렇게 완벽한 다섯의 조합은 다시 이루어지긴 어려울 것 같은 정도의 친구들이었다. 마치 하나의 손에서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다섯 손가락과도 같았다. 쓰쿠루를 제외한 네 명의 친구는 각각 이름에 색깔을 나타내는 글자가 하나씩 포함되어 있었다. 그 색에 따라 두 명의 남자에겐 빨강(아카), 파랑(아오), 나머지 두 명의 여자 친구에게는 검정(구로)과 하양(시로)을 뜻하는 별명이 붙었다. 그에 비해 쓰쿠루라는 이름은 그저 ‘만들다’라는 뜻을 가졌을 뿐 색이 들어가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색 이름 대신 ‘색채가 없다’라는 별칭을 받게 된 것이다.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현재 30대 중반이 된 쓰쿠루의 순례는 대학생 때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간 의문의 사건을 되짚어 나가는 여정이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위의 네 친구로부터 대학교 2학년 때 느닷없는 절교를 통보받은 것. 마땅한 이유도 없이 더이상 그들을 찾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수화기 너머로 '아오'에게서 전해들은 그는 작중의 표현처럼 ‘짙은 어둠이 깔린 망망대해에 홀로 풍덩 빠진’ 사람이 되어 절망감과 우울감에 빠져든다. 깊은 상처는 멍에가 되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의식과 행동에 조용히 영향을 미친다. 그러던 중 애인인 '사라'의 말을 듣고 자신을 잔인하게 내친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방문하며 진실을 마주 하는 길을 우리는 살금살금 따라가게 된다.

※ 아래부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읽고
 
  어려서부터 전철 역을 바라보는 게 취미였던 쓰쿠루는 철도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작품 중반부에 한 전철역장으로부터 분실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역에 접수되는 분실물은 온갖 것들이 있는데 포르말린에 든 작은 손가락 한쌍이 그가 본것 중 제일 음침했다는 것. 다지증을 가진 사람들이(손가락을 여섯 개 가진 사람, 육손이) 어린시절 자른 여섯번째 손가락을 그렇게 보관하기도 한다나. 수소문 했지만 끝내 주인을 찾지 못한 분실물로 남아 경찰에 인계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쓰쿠루가 여섯번째 손가락이라는 누명을 쓰고 잘못 잘린 엄지손가락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잘려야 했던 것은 시로에게 들러붙은 악령이었을텐데.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쓰쿠루가 내쳐진 이후 구심점을 잃고 흐트러진 것처럼, 엄지를 잃은 손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와해되었고 제때 적합한 치료를 받지 못해 괴사했던 것 같다.


의문
 
하이다와 미도리카와, 그리고 동성애
 
  작품의 초반에서 쓰쿠루가 네 명의 친구들을 잃고 난 뒤 괴로움에 몸부림 치다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하이다다. 아침 수영을 같이한 둘은 대화나 삶의 리듬의 코드가 잘 맞아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쓰쿠루의 집에 자연스럽게 출입하게 된다. 하루키는 하이다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과 하이다가 쓰쿠루에게 해주었던 '무서운' 이야기(미도리카와 일화) 그리고 약간의 동성애 코드를 소설 속에 그려 넣었는데 이 세 가지의 의미가 나에게는 다소 모호했다. 후에 쓰쿠루가 '아카'를 찾아갔을 때 '아카'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16년 만에 처음 만난 쓰쿠루에게 털어놓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의미를 가진 장치였을지 알고 싶었다.
  참고로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하이다는 '회색', 미도리카와는 '초록색'이라는 색채를 띤 이름이다. 이 역시도 뭔가 맥거핀 같은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아쉬움
 
1.
  읽는 동안 쌓이고 쌓인 의문과 갈등을 결국엔 '악령'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요소로 해소한 부분에서 김이 조금 샜다. 비현실적인 플롯의 결말로 '깨고 보니 꿈'이라고 설정하는 것처럼 결국 만능 치트키에 기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1Q84」를 생각하니 '악령' 정도면 훨씬 더 리얼한 현실에 가깝다는 쪽으로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오히려 현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그런 식으로 종종 나타나는 법이니까. 또한 아직 읽지 않은 하루키의 작품이 아주 많기 때문에 비현실적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 내가 미처 몰랐던 일상적인 특징이었을 수도 있겠다.
 
2.
  2023년인 지금, 페이스북과 트위터(집필 당시만 해도 둘의 현재 모습이 어떨지 감히 하루키라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가 등장하고 아이팟과 줄 이어폰이 등장하는 배경은 「1Q84」의 80년대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아직은 열렬히 추억하고 싶지 않고 시대에 대한 환상이 없는 2010년대가 '애매한 과거'로 느껴져 다소 촌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대로 보이는 쓰쿠루의 대학시절, 하루키의 소설답게 어김없이 LP와 CD가 등장했어도 말이다. 출간 시기에 맞추어 읽었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르게 느꼈을텐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남는다.
 
인상깊은
 
  자신을 잔인하게 내친 친구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보니 '아오'와 '아카'가 있는 나고야에 도착했을 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 인지 둘은 쓰쿠루를 환대해주었다. 쓰쿠루가 '시로'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를 그룹에서 내보내야했던 이야기, 하지만 '시로'를 제외한 모두가 쓰쿠루는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닐 걸 믿고 있었다는 것 등등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의 오해가 한 겹 한 겹 벗겨지면서 긴 시간 동안 쓰쿠루가 앓아야 했던 깊은 아픔이 다시금 통째로 전해졌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해 자신의 소멸에 대해 반년 가까이 진지하게 고뇌한 결과라고, 그리고 그런 나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고, 쓰쿠루는 말할 수 없었다. 드러내 놓고 말한들 그때의 절박한 마음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애당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쓰쿠루는 묵묵히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지 일주일이 넘어가지만, 순례의 마지막 일정에 도달해 쓰쿠루가 구로를 찾아 핀란드로 떠난 장면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일본에서 핀란드까지 그저 친구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겨우 4박 5일만 휴가를 갔다온다고 하면 '그렇게 까지?'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쓰쿠루에겐 인생의 다음 챕터로 향하는 길이었기에 너무나 특별했다. 실제로도 물리적인 이동이 있었지만 하루키가 일본이 아닌 완전히 낯선 북유럽 국가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것을 처음 보기도 해서 더 기억에 남은 듯하다. 탁월한 묘사에 흡사 영화를 보는 듯했고 왠지 예전에 tvN에서 보았던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이 떠올랐다.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Années de Pèlerinage>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1Q84」의 메인 테마곡이었다면 「색채가 없는...」 의 주제곡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곡 'Le mal du pays(르 말 뒤 페이)'이다. 이 곡이 수록된 피아노곡집의 이름이 바로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Years of Pilgrimage)'. 프란츠 리스트가 무려 40여 년간 공들여 지은 대작으로 총 3권으로 이루어진 곡집이다. 전체 재생 분량만해도 2시간 반 정도. 독서와 함께 듣기 좋은 클래식이라 실제로 나도 이 책에 재미를 붙여 진도를 많이 나간 날 그렇게 했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하루키는 이 '순례의 해'라는 작품에서부터 먼저 영감을 받아 쓰쿠루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남 모를 사연이 숨어있을 것 같은 진한 신비로움이 충만한 '순례의 해', 소설 제목으로서 정말 매력적이다.
  
   'Le mal du pays'는 바로 '향수병', 노스탤지어를 뜻한다. 대학과 직장을 위해 홀로 도쿄로 이사온 쓰쿠루의 고향은 나고야이며 그에게 나고야는 곧 언제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식처었다. 연이 끊긴 친구들의 현재 거취를 확인하고 직접 찾아가 그 당시의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 이로써 소설에서 쓰쿠루는 자신이 16년간 앓았던 향수병을 극복하며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된다. 모호한 추측과 수수께끼로 가득했던 마음 속 기억을 순례로 말미암아 구체적인 사실들과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차갑고 단단한 얼음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러한 주인공의 성장은 소설의 마지막,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던 사라에게 연락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마치며
 
  쓰쿠루는 친구들이 고등학생 당시 쓰쿠루 자신과 그룹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정을 통해 깨닫는다. 쓰쿠루에게 자기 자신은 말 그대로 '색채가 없이' 평범하고 다섯 명 중 가장 특징 없는 존재였지만 다른 친구들은 쓰쿠루를 그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지주에 가장 준수한 외모를 가진 '도련님'이었다고 회상한다. 또한 쓰쿠루는 그룹 내에서는 서로 암묵적으로 연정을 품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모든 구성원들이 쓰쿠루처럼 다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만큼은 일치했던 것 같아보인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나와 주변에서 보는 내가 일치하기란 여야대통합처럼 어려운 일 같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결여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위로를 하루키는 전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을 옭아매며 발전의 싹을 시들게 만드는 개개인의 과거를 힘겹더라도 차분하게 마주하고 담담하게 포옹한다면 비로소 그 어깨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지혜로워진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란 수염같은 것이다. 성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https://youtu.be/Z9vAJ_H0rao

le mal du pays, lazar berman

 

헤멘린나의 구로에게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