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권을 읽고.

※ 「1Q84」 1권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약하게 담고 있는 글인데 이 정도는 그냥 읽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1Q84」 1권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굉장한 레코드 수집가라는 것이 작품과는 별개로 그를 더 멋스러워 보이게 했다. 처음 읽는 그의 작품으로도, 그리고 글자들과 어색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1Q84」를 선택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그의 이야기 전개 방식과 '적확'한 비유 덕에 읽기에 가속이 붙어 1권을 일주일 만에 독파할 수 있었다. 물론 충분히 시간을 들이기도 했지만 전공서적을 연상케 하는 이토록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 자체가 서른 이후의 내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문학의 끌어당기고 매달리게 하는 힘은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웬 암호같던 책 제목 '일-큐-팔-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출간 당시 동네마트 책 코너에서까지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던 그 십수 년 전부터 성가시도록 궁금했었다(그런데도 여태껏 읽지 않았던 나도 만만치 않다). 그 궁금증을 해소한 것이 책을 읽으면서 거둔 수확 중의 첫 번째였다.

 

  「1Q84」는 주인공 '아오마메'의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또 다른 주인공인 '덴고'의 에피소드가 교차로 이어지며, 마지막 장까지 손바닥 쌓듯 둘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처음 서너 장까지 두 인물은 평행하는 두 직선과도 같았다. 하지만 1권의 후반으로 갈수록 나중엔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과연 하루키는 얼마나 극적으로 둘을 만나게 할까?라고 두근대면서 책장을 넘겨나간 것이 이 책 내용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가장 큰 재미였다. 아쉽거나 다행히도, 1권에서는 '신포니에타'나 '10세 때 손을 꼭 잡았던 기억'과 같은 미묘하고 실낱같은 힌트만 주어지고 접점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는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2권을 빨리 읽고 싶어졌다.

 

  어떤 책이나 글이든 한 번 읽은 후 웬만하면 그 즉시 삭제해 버리도록 작동하는 나의 뇌. 이에 미약하게나마 제동을 걸어보기 위해 이번에는 1권을 구성하는 스물네 개의 장(章) 하나하나의 읽기를 마칠 때마다 각각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완독한 후 요약문을 다시 읽어보았더니 '리틀 피플', '선구'같은 것들로 인해 들뜬 마음과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한 발짝 멀리서 1권 전체의 그림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중에 언급된 책이나 음악, 영화, 그리고 술 등에 관해서도 간간이 기록을 해두었다. 1장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미쓰비시 파제로', '도요타 셀리카' 등의 자동차들은 검색해 보니 한국과 일본에서 열광하는 '올드카'라고 불릴 만한 수려한 생김새의 차들이었다. 여기서부터 벌써 하루키의 감각에 대한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아오마메가 탔던 택시에서 흘러나온 「신포니에타」는 책을 읽으면서 배경음으로 틀어두기도 했다. 짧은 시간 집중하며 듣기에 아주 적당했다. 바흐의 평균율도 마찬가지로 독서에 필요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톰 콜린스'는 이름 외에도 레시피가 단순하여 같이 적어놓았다. 아오마메가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고급 와인들은 몰라도 위스키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던 터라 반갑게도 좀 더 이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커티삭'과 '와일드 터키'는 향만 맡아도 구분할 수 있으니까.

 

  40세, 혹은 50세가 되어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작품을 구성하는 위와 같은 다채로운 소스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게 될지 어림 잡아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20대에 차곡차곡 쌓은 견문으로 무장한 지금(30대 초반)이 이 책을 읽기 제일 좋은 시기일 거라고 생각한다. 운이 좋았다. 만약 출간 당시(2009년)와 같은 너무 어린 나이일 때 읽었다면 아마도 내 감수성을 과도하게 뒤흔들었을 것이다. 한동안 헤어 나오기 힘들었겠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중학생 때 관람하지 않았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던 20대 초반의 내가 떠올랐다.

요약문 중 일부

1장에 등장하는 자동차들

 

  책을 읽으면서 재밌었던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적확하다'는 표현이 이상하리만큼 많이 등장한 것. 예전에 봤던 '우리말 나들이'같은 TV프로에 언젠가 소개가 된 단어라 낯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애정이 느껴질 정도로 자주 사용될 줄이야. 우리나라의 글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정확하다'를 비교적 더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선 오히려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 문학에서 보통 그런지, 하루키가 유달리 많이 사용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같은 이야깃거리를 서로 다른 묘사로 여러 번 반복해 독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은 정말 친절하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작중에서 '선구'라는 코뮌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즉, A라는 일화를 먼저 한 인물을 통해 소개하고, 등장인물이 그 일화를 구체적으로 A'라고 하면서 한번 더 곱씹고, 적당한 포인트에서 뉴스나 신문기사를 통해 A''라고 다시 언급된다. 이 방식으로 말미암아, A라는 내용을 독자가 확실히 이해해 주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만족하면서 그 자체로 A가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아주 중요한 맥락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맥락에서 중요한 표현에 대해서 글자 위에 점을 낱낱이 찍어둔 것도 재미있었다. 보통은 볼드체, 이탤릭체나 밑줄로 강조를 많이 하는데 그동안 생각만 해봤지 책에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꽤나 참신했다. 한글 워드 편집기에서는 글자 위에 점을 찍는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익숙하지 않았는데 어떤 과정으로 글자를 디지털로 옮겼는지 궁금했다.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에 돌이켜보았을 때 여러 장면이 떠오르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3장에 등장하는 아오마메의 치밀한 작업에 대한 묘사다. 전체를 통틀어 결정적인 장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업을 할까?라고 떠올렸을 때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작업에 사용한 도구와 방법, 전체 과정이 아주 긴장감 있고 생생하면서도 우아하게 서술되어 스릴러 영화의 결정적인 시퀀스를 눈으로 직접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일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기에 사명감과 숭고함도 느껴졌다. 덕분에 '아이스 픽'이라는 도구와 그 생김새, 쓰임도 처음 알았다.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진 앨범 중에 어떤 게 읽은 내용과 잘 끼워 맞추어질까 궁리해 보았는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명반 중 하나인 「Miles Ahead」가 딱이었다. 「신포니에타」의 도입부 팡파레를 연상시키는 길 에반스(Gil Evans) 오케스트라의 브라스 연주가 앨범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플루겔혼 연주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묘하게 따라가는 듯하다. 하루키의 세련된 비유와 묘사에 걸맞은 호화로운 재즈 튠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유미와 아오마메가 식사를 하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는 'Springsville'이나 'New Rhumba'가 연주될 법하고, 덴고가 홀로 위스키를 홀짝이거나 바에서 맥주를 마실 때, 소설을 집필할 땐 'Lament'이 잘 어울리겠다. 'Blues For Pablo'를 듣고 있으면 '버드나무 저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인과 아오마메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1권의 후반부에서 아유미는 자신의 과거를 덤덤히 털어놓으며 말한다.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불필요한 수모를 통해 얻게 된 통찰일까. 아유미가 겪고 현재까지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어린 시절의 어려움이 이 한 마디에 요약되어 있었지만, 아유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1Q84」는 이렇게 주인공 주변인의 한 마디 대사만으로도 다음 장, 다음 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 공든 탑은 과연 어떤 결말을 향해있을까? 2권을 기대하며 이번 독후감상문을 마친다. 

1957년 발매

라이너노트가 빼곡한 뒷면.

https://youtu.be/dfjCAb0WsbY

'Springsville' : 아오마메와 아유미가 적당한 남자를 찾지 못했던 날 샐러드와 뇨끼로 저녁식사를 했던 곳의 테마

https://www.youtube.com/watch?v=YMoOIJCPbLw 

'New Rhumba' : 아오마메가 기억을 잃은 날

https://youtu.be/ogsT8wVqiWQ

'Lament' : 주로 덴고가 홀로 상념에 빠질 때 잘 어울릴 만한 곡. 버번 위스키도 같이 곁들이면 좋다.

https://youtu.be/UGyFmzcBEP0

Blues for Pablo : 아오마메와 노부인이 같이 있을 때. 특히 나비정원과 잘 어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