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읽고.

2016. 기시 마사히코 지음. 출판사는 '이마'로 바뀜.

 

"요령부득인데다 똑 떨어지는 답도 없는 흐리터분한 책이지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맺음말> 중

 
 
나의 단편 하나

  <디지몬 어드벤처>가 처음으로 KBS2를 통해 국내에 방영되었을 즈음에, 나는 운 좋게도 그 만화를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연령대에 속해 있었다. 본방 사수를 위해서는 미술,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도장은 방영 시간을 꼭 피해서 다녀야 했다. 다음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내용을 복기하는 것은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행하는 가장 중요한 루틴 중 하나였다. 일주일을 기다려 방영 시간이 되면, 미리 한창 광고 중인 티비를 켜고 기다린다. 오프닝 테마곡을 따라 부르고, 억겁 같은 광고 시간을 재차 견뎌야 한다. 마침내 TV화면 우측 상단의 <디지몬 어드벤처> 로고가 사라진다. 그것은 '본 광고 이후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린 디지몬이 시작합니다'라는 뜻으로, 그때부터 나는 지난주에 봤던 <다음 화 예고>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면서 한 템포 더 빠르게 두근거리는 작은 심장을 부여잡곤 했다. 이윽고 맞이하는 본편, 그리고 다시 또 한 번의 <다음 화 예고>로 넘어가기까지는 2~30분 남짓. 너무나 찰나 같아서 야속했다가도, 본 방송을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 속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제일 좋아했던 엔젤몬

  디지몬 1기 이후 2기 <파워 디지몬>으로 스토리가 발전하면서 그런 어린이에게도 돌연 때이른 허무가 사무쳤다. 메인 디지몬들이 쌍을 이루어 합체진화를 하기 시작했을 무렵, 마지막으로 내 마음속의 히어로였던 대망의 '엔젤몬'이 그 차례를 앞두고 있었다. '엔젤몬'은 전 세계 아이들의 늠름한 수호신 같은 모습을 하고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종횡무진하며 적을 무찔렀다. 합체진화의 순서도 가장 마지막이기에 '안 그래도 멋있는데 얼마나 더 멋있어 질까?' 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아이들의 기대와 흐름 상으로, 적어도 그 진화체는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황금빛 갑주를 두르고, 태양의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무기를 지닌 상상도 못 해 봤을 멋진 모습을 가졌어야 한다. 그러나 그 궁극의 피사체는 온데간데없고, 멋으로부터 가장 극단의 것이 쓸데없이 그를 대신하여 비장한 bgm을 뚫고 등장했다. 흡사 꼴뚜기 왕자와 깡통로봇의 혼종 같았다. 이름도 이상했다. 도대체 왜 '엔젤몬'이 진화하여 '토우몬'이 되었어야 했을까? 아무리 다른 디지몬과 섞였다고 한들, 신비주의의 결정체인 '엔젤몬'이 기괴한 형상으로 탈바꿈해야 했던 이유는 아직도 불가사의다. 나에게 아이돌과 다름없었던 엔젤몬의 눈물겨운 추락을 목격하며 동심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충격을 무방비로 감내해야 했다. 
 

도대체 왜요

 
  지금까지도 디지몬 세대와 팬들 사이에서는 최악의 진화로 '토우몬'이 회자되고 있으며, 관련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로 '엔젤몬'의 합체진화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공분을 샀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도, '엔젤몬'에 의해 타락해 버린 이 어린 날의 기억이 가치관에 영향을 줄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으며, 염세를 깨우치게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후에 이따금 매체에서 ‘토우’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토우몬'과 그 충격을 연상할 뿐이다. 그렇지만 충격도 잠시, 계속 곱씹다 보면 잇달아 디지몬들 덕분에 설렜던 저녁과 다마고치의 추억, 즐거웠던 에피소드들이 비눗방울처럼 둥실둥실 눈앞에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생애는 이렇듯 저마다의 시시콜콜한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훗날 본인에게 큰 전환점이 되거나, 돌이켜 보았을 때 후회와 반성을 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오늘 책의 글쓴이인 기시 선생님 역시도 인생의 의미와 정답을 보물찾기하듯 쫓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인터뷰의 형태로 모아 온 여러 이야기들을 분석하여 사회의 거시적인 흐름을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히려 빠져드는 것은 사실 이러한 분석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 '색이 바래서 잊혀져 사라지는 이야기들', '그냥 그곳에 있어왔던 일들'이다. '엔젤몬'이 왜 '토우몬'이 되었어야 하는지 보다 '토우몬'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실망한 이야기 자체에 그는 아마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책 소개 
 
  글쓴이의 이름은 '기시 마사히코'로, 이웃 나라 일본의 사회학자다. 수십 년 동안 연구의 일환으로 각계각층의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구술 조사(인터뷰)를 했다. 이 책에서 그는 개개인으로부터 발굴해낸 '무의미'한 단편들로 일본 사회를 비추었을 때 드리워지는 깨달음을 공유한다. 평범함, 불완전함, 차별과 혐오, 유머 등이 그 소재다. 본 편은 열여섯 장으로 구성되며, 하나의 장 안에서는 적어도 세 개 이상의 이야기 조각들이 등장한다. 그 조각들이 퍼즐처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흐리터분'하게 작가의 생각을 뒷받침하며 '무의미함' 그 자체로 책 안에 존재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두에게 무의미한 조각이 있지만, 서로 의미를 찾으며 조금은 정답게 기대면서 살면 어떨까'하는 메세지를 살며시 내놓는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장애인, 소수자와 같은)딱지가 붙여진 채 딱지의 가치를 전도시키고, 딱지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품는 것, 이것이 평범함이 된다.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딱지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딱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일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다."

 

감상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다. 대상이 같아도 각자의 감상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감상을 수도 없이 받아들인 사람의 가치관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 싶었다. 차별이 끝없이 재생산되는 사회, 그리고 고독과 허무로 얼룩진 삶을 그자체로 따뜻하게 바라보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그저 읽기만 함으로써 잠시 엿보았지만,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까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억지로 본문으로 끌고 들어가는 자극적인 장치들이 없었기 때문에 초반부터 슴-슴하게 읽기 좋았다. 물론 개중 다이너마이트 일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실실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도 맺음말에서 스스로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란 부족한 것 투성이, 아귀가 맞지 않는 것 투성이'라고 싱겁게 말하는 작가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가벼워졌다. 현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유튜브로 벗어나는 것은 피상적이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누군가의 내밀한 단편들을 읽는 것은 그런 부담의 심지까지 젖은 휴지로 문질러 닦는 기분이었다. 
 
  또한 작가 자신의 기억이나 누군가의 발화를 글자로 옮겨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유머러스한 글은 그 자체로 재밌다. 민감한 주제 거나 말 그대로 '무의미'한 이야기는 최대한 기름기 없이 짧고 담백하게 서술했다. 제 아무리 작가여도 일필휘지로 이러한 양질의 글을 써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숙고를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쳐 잔뜩 덜어낸 결과일 것이다. 나도 어떤 이야기를 글로 풀어낼 때 재미가 없어서 여러 문장과 표현을 과감히 없애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삭제들엔 번번이 어떤 두려움이 녹아있다. 그러나 조금 밋밋하고 특색 없이 슴슴해도, 매력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도 충분히 가능함을 배울 수 있어 기뻤다. 
 
끝
 
  구술 조사를 하는 사회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인터뷰어’를 직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어냄으로써 사회의 제반 현상을 연구하는 전문 인터뷰어다. 대화를 이끎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산발하는 연계 질문을 골라내서 순발력 있게 던지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진심을 다해 반응할 것이다. 인터뷰이를 편안하게 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덕목이겠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서 묻혀있던 기억을 불현듯 떠오르도록 유도하는 능력, 그것에 얽힌 일화를 들떠서 말하게 하는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지 않을까. 사명을 다해 사람들로부터 사연을 수집했을 뿐인데,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넓히는 수양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업(業)의 매력을 느꼈다.
 

한국경제 24.02.24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中에서

지옥으로 변한 세계에서 염세주의 철학이 심리적 도피처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열풍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과 온갖 결핍과 근원적인 불완전함으로부터 지옥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그도 아니라면 현실에서 오는 중압감을 무기력하게 견딜 뿐이다. 이게 삶의 실상이라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어쨌든 ‘헬조선’은 우리 안의 적폐가 만든 결과물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결핍과 고통을 삶에의 의지로 바꾸는 지혜, 절망을 딛고 절망을 넘어서는 지혜, 권태와 나태를 떨치고 일어서는 지혜 따위일 테다.

 
  결국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서 말이나 되는 구슬을 가지고 서둘러 꿰려 하기보다는, 낱알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슴슴한 감동이 가득한 책이었다. 삶의 실상이 사실은 느닷없는 '토우몬'으로 가득 찬 유감스러움의 연속임을 덤덤히 받아들인 채로, 우리는 장석주 시인이 위에서 말하는 지혜를 이 책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