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를 읽고. (1) - 프롤로그와 1부

최근에는 개정판 및 리커버본이 나와 이것보다는 더 읽고 싶게 디자인 되었다.

 
  서재에 「총, 균, 쇠」가 꽂혀있는 가정은 많지만 완독 했다는 사람은 그에 비해 모자란다는 말, 다들 공감할 것이다. 한 음절을 세 번 반복하며 주제를 간결하고도 임팩트 있게 드러내는 책 제목과 더불어 '서울대 도서관 대여 순위 1위'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이 책을 스테디셀러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가 '트롤리 딜레마'같은 담론들로 세상에 등장하며 고3이었던 나를 비롯한 많은 수험생들을 괴롭혔었는데 「총, 균, 쇠」는 과연 그 존재만으로 지난 20여 년간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에게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을까? 우리의 세계가 미지로 가득한 21세기로 진입하기 직전 출간된 이후로 지금껏 많은 매체들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총, 균, 쇠」. 최근 재미있게 읽었던 몇 권 덕분에 독서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이 줄어들고 있는 지금, 스테디셀러라는 타이틀이 주는 기대감과 '도대체 뭐길래'하는 마음으로 나도 책꽂이에서 잘 숙성된 「총, 균, 쇠」를 꺼내 들었다. 
 
  유튜브에 「총, 균, 쇠」를 검색하면 내로라하는 명사들의 요약 강의가 짧게는 수 분, 길어도 한시간이 채 안 되는 분량으로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다. 이렇게 요약본이 많은 시대에 글자가 빼곡하고 두꺼운 책을 꼼꼼히 완독 하는 것은 누군가는 오히려 시간 낭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강의들은 완독 이후 시청할 때 비로소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서 없이 툭툭 터치 몇 번으로 방대한 정보의 압축본을 소비한다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알려준 것처럼 뇌는 가십거리 정도로 가볍게 인식할 것이다. 이는 곧 빠른 휘발로 이어진다. 서글프지만 아무리 가치있는 정보라도 여러 차례 반복되지 않는 한 나의 뇌 속 장기 기억 보관함으로 아카이빙되지 않을 것임을 이제 잘 알고 있다. 또한 적어도 1회 완독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강의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꼬리 질문의 질이 결코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독서에 시간을 들이리라 결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600쪽이 넘는 분량의 인문/역사/과학 교양서적의 독후감을 한 편으로 끝내기엔, 온전하고 꼼꼼하게 내용과 감상을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이번엔 특별히 '부'별로 나누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 첫번째, 프롤로그와 1부에 관한 내용이다.
 

프롤로그 :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품다.

  곱씹으며 읽느라 프롤로그를 넘기는 데에도 예상을 웃도는 시간이 걸렸다. 친절하게도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전체 4부에 달하는 내용을 프롤로그를 통해 간략히 요약하여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려운 내용 아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니까 걱정말고 잘 따라오세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후반부에는 부, 장별 세부적인 개괄이 소개되어있어, 중간중간 복습 차원에서 다시 펼쳐보면서 내용을 복기하기에 아주 좋았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왜 백인에 비해 우리 흑인들은 그런 발전된 문명의 산물을 만들지 못했냐'는 뉴기니인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주제로 저자는 논의의 포문을 연다. 특히 유라시아에서는 인류의 등장이 수백만년이나 늦었음에도, 거의 모든 방면에서 다른 대륙보다 앞선 속도로 비교불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저자가 주장한 이 격차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지질, 면적, 자원 등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환경 차이이다. 그로 인해 발전의 편차가 생겼다는 것. 자칫 고루하게 여길 수 있는 이 같은 환경결정론에 대한 반론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저자는 조목조목 반박하며 주장을 관철한다. 게다가 이 '환경'이라는 요인은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뿐.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문제에 대한 더 깊은 궁극적인 해답, 즉 환경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을 4부에 걸쳐 세심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인류와 문명의 발전사에서 꼭 한 번은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인종주의를 역겹고 허황된 논리라고 일축한다. 이 점이 아주 통쾌했다. 한 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높은 지능을 가졌거나 원시적인지에 대한 증명은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사회에서는 인종이 무언가를 결정할 것이라는 차별적인 시선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집필 당시 "인종차별적인 생물학적 설명"을 어떻게든 퍼트리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이성적인 폐단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집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1부 :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폴리네시아 제도의 지도

 
  저자는 대륙 간에 발생한 발전 속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1부의 2장에서 폴리네시아 모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최근 한 가지 일에 좀처럼 집중이 어려웠음에도 깊이 관심을 쏟게 될 정도로 매우 흥미로웠다. 내용은 이렇다. 폴리네시아의 수 많은 섬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동일한 조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를 거치며(수 세기란 인류 역사를 놓고보자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며 쇠퇴하거나 진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섬들의 지질 유형, 면적, 해양 자원, 고립도와 같은 다양한 환경적 차이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환경적 차이는 자연히 식량 조달 방식에서 차이를 만들었고, 이어서 인구 밀도와 인구 규모(정치적 면적으로 계산한 규모)에 격차를 벌리게 된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모여사는지, 그리고 서로 어떻게 모여 사는 지에 따라 그들이 집단을 유지하는 방식이 제각기 달라진다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렇듯 환경의 차이로 빚어진 섬과 부족별 다양화가 대륙, 즉 더 큰 규모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저자는 고찰한다.
 
 

수 만을 거느렸던 아타우알파 황제를 납치한 피사로와 160여 명의 병사들.

  1부의 3장에서는 근대 서구 열강이었던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본격적으로 신대륙 원주민과 충돌했던 결정적 사건인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을 제시하며 이후 숱하게 이루어진 서구 열강들의 신대륙 원주민 정복을 살펴보았다. 수 많은 원주민들을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절멸할 수 있었던 것은 "총", "균", "쇠" 때문이다. 직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곤봉을 들었을 뿐인 잉카족 원주민들은 정예 기마부대와 총탄으로 무장한 스페인 제국에 맞서야 했고, 천연두 마저 뒤이어 신대륙의 인구 대다수를 소멸시켰다. 여기에 더해 발달된 문자 체계가 없었기에 스페인에 대한 일말의 정보조차 부족 간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파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신대륙과 구대륙의 충돌, 발전 차이가 있는 부족간의 충돌 등 모든 결과가 역사적 사료로 남아있다는 이유로 자칫 '발달된 문명이 원시적인 문명을 흡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왜 그 반대가 되었는 지', 그리고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하얀 피부의 이방인들이 영영 그들을 지배하고 영토를 정복할 것이라는 것을 왜 당연히 예측하지 못 했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풀이해줌으로써 이를 불식시킨다. 이런 것들에 큰 재미를 느끼며 1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무기와 금속, 문자와 말(馬) 등 '직접적인 원인'들이 왜 신대륙보다 구대륙에 편중되었을까? 저자가 탐색하는 이 '궁극적 원인'을 2장과 3장을 통해 밝힐 수 있길 기대한다.